6ㆍ10 항쟁 21주년인 10일 밤 서울 도심은 지난달 2일 촛불집회 시작 이후 최대 인파로 물결쳤다. 10만여 명(경찰 추산. 주최측 추산은 70만명)의 시민들은 세종로에서 태평로를 거쳐 숭례문 인근까지 이어지는 1km 구간 도심 거리를 가득 메우며 촛불집회의 기세를 한껏 고조시켰다.
촛불로 포위된 청와대
밤 9시 40분께 문화제를 마친 촛불 행렬이 동서로 양분해 행진하며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막은 차단벽을 포위하자, 한때 경찰이 비상대응에 나서는 등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은 시위대 3만5,000여 명은 종각과 조계사 앞을 거쳐 밤 10시께 동십자각 사거리에서 컨테이너 차단벽을 설치한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청와대행을 봉쇄하기 위해 9개 중대 병력과 3중 차벽을 배치했다.
신문로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한 시위대 2만3,000여 명은 밤 10시께 독립문 사거리에서 경찰 차벽과 맞닥뜨렸다. 경찰은 이곳에서 기동대 버스와 16개 중대 병력으로 시위대가 사직터널을 거쳐 청와대 방면으로 진입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시위대 일부가 경찰 버스의 기름 탱크를 열어 촛불로 인한 화재가 우려됐지만, 다른 시민들이 곧 모래를 뿌려 상황을 정리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일부 시위 행렬은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으로 향했지만 역시 3중 차벽에 가로막혔다.
세종로 사거리에 남은 1만 3,000여 명도 대형 컨테이너 차단벽과 경찰 18개 중대가 쳐놓은 3중 차벽 때문에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북상'에 실패한 참가자들은 컨테이너 앞에서 한국외대 풍물놀이패가 펼치는 공연을 보며 동참하거나 즉석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경찰은 이날 세종로 사거리와 적선동, 안국동 등 3곳에 60개의 대형 컨테이너로 차단벽을 설치했고, 서울에서만 221개 중대 2만 2,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거리 시위대의 청와대행을 막았다.
진보-보수 곳곳서 신경전
진보ㆍ노동단체 회원과 학생, 시민 등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이날 시내 곳곳에서 자체 행사를 가진 뒤 오후 7시 전에 집회 장소인 태평로 일대로 속속 모여들었다. 촛불문화제가 점화한 오후 7시께 '촛불'은 세종로 사거리에서 숭례문 인근 구간 태평로 거리를 가득 덮었다.
태평로 바로 옆, 시청앞 서울광장에서는 버스 차벽을 '이념분계선'으로 보수의 거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소속 회원 7,000여명이 서울광장에 모여 '법질서 수호 및 한미 FTA 비준촉구 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던 다수가 궐기했다"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불법집회를 주동하는 좌익 세력을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오후 6시께 자체 행사를 마친 뒤 뉴라이트연합 등 보수단체 소속 목사들의 주도로 '철야 구국기도회'를 이어갔다.
종로구 대학로 일대에서도 보수단체의 집회가 잇따랐다. 새물결국민운동중앙회(대표 김용래)는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오후 5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한미 FTA 비준 촉구 문화행사'를 열었고, 대학로에서는 MB서포터스 회원들이 오후 6시부터 '경제살리기 문화행사'를 가졌다.
국민행동본부 집회 행사장인 서울광장 곳곳에서는 이날 낮부터 보수단체 회원과 미리 나온 촛불집회 참가자들 수십 명이 뒤섞여 언쟁과 몸싸움이 이어졌다. 국민행동본부 소속 60, 70대 회원들은 미리 나온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여기서 나가라, 남의 행사에 재뿌리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했고, 20, 30대가 중심인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어르신들, 역사공부 다시 하고 오라"며 맞섰다.
뿔난 참가자, 집회는 평화 분위기
촛불집회는 최대 규모의 인원이 운집했지만 여느 때보다 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서울광장에서는 가족 단위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을 가운데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인기 TV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를 본 떠 정부에 화난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뿔 머리띠를 쓴 참가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아내, 아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이모(41)씨는 "자주 이곳에 오는데, 오늘은 더 평화로운 것 같다"며 "구호를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 가족끼리 모여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집회가 끝난 뒤 대형 비닐 봉지를 들고 태평로 일대에서 쓰레기를 줍던 20대 청년 수십여 명은 시민들을 향해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 가세요"라며 캠페인성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서울광장 '구국기도회'에서는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바깥에서 기도회를 지켜보던 한 신자가 "당신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며 소리치자, 안에서 집회를 진행하던 참가자는 "악마들"이라고 맞받아쳤다.
한편 로이터, AP, 월스트리트저널과 일본의 TBS, TV아사히 등 외신들도 보수단체 집회와 촛불집회를 밀착 취재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이영창 기자 강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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