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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2> 대박 터진 "시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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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2> 대박 터진 "시인 만세"

입력
2008.06.1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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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시와 함께 살아야 한다. 시인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싸움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항상 강조 하던 분이 계셨다. 이 분은 ‘한국일보’를 창간했고 우리가 지금까지도 ‘왕초’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있는 장기영 선생이다. 그 분은 시를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언론 사상 처음으로 시를 신문 앞 페이지에 매일 싣기도 했다. 예쁘게 박스로 짜서 눈에 잘 띄는 곳에 시를 실을 때 솔직히 간부들 일부가 반대를 했지만 그는 그냥 밀어 붙였다.

1960년대 초에는 국민들이 시를 많이 읽지 않았다. 시집도 지금처럼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런 무렵에 시를 신문 맨 앞에 매일 게재하니까 편집국 간부들이 좋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가 실리기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독자들의 반응이 놀랄 만큼 좋아지면서 반대 의견은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그 시 때문에 신문 부수가 부쩍 늘어나게 되었다.

왕초는 우리들에게 최소한 한두 편씩 시를 외우고 다니라고 늘 강조하곤 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기영 선생은 한국일보를 잠시 떠나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있었다. 그 무렵에 주간한국 부장인 김성우 선배가 생전에 보지도 못한 생소한 사업 아이디어 하나를 던졌다.

“시 낭송대회를 엽시다. 이왕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민회관에서 합시다. 그리고 시를 주제로 한 여러 가지 행사를 합시다. 이 행사의 진행은 정홍택씨가 책임지고 맡으시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부장이 하자는데 토를 달 수도 없고, “그럽시다. 합시다” 라며 일에 착수를 했다. 우선 장소가 중요하니까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가서 3,000석이 넘는 대강당을 대관했다. 과연 시 낭송으로 3,000석을 모두 차게 할 수 있을까?

김 선배는 이 이벤트의 타이틀을 <시인만세> 라고 만들었다. 과연 제목 만드는 달인다운 발상이었다. 프로그램은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는 저명 시인들이 무대 중앙에 나와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이다. 서정주, 구상, 조병화, 김남조 선생 등 원로 시인들이 모두 참여했고, 당시로는 젊은 나이인 박재삼, 정공채, 이근배 시인 등 우리나라 시인들이 거의 전부 동참을 했다. 제2부는 시를 노래로 부르고, 무용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입체무대로 꾸몄다. 또한 제3부는 아마추어 시 동호인들이 나와서 시를 낭송하는 시간인데 이 제3부가 그야말로 끝내주는 하이라이트였다.

제3부에 나가서 낭송할 사람을 어떻게 선정하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다. 김성우 선배는 ‘이왕이면’을 연발하면서 주간한국 신문에 광고를 내어서 희망자를 모집하자는 것이다. 광고를 냈다. 세상에! 세상에! 1,000명 정도가 “나요, 나요”하면서 응모를 했다. 이거 일이 크게 터졌다. 그냥 신청한 순서대로 뽑을까? 퀴즈 상품 주듯이 심지 뽑기를 할까? 망설이다가 예선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며칠이 걸려도 좋으니까 시를 낭송하도록 해서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 식인 것이다. 말이 쉽지 장난이 아니다. 하루에 30명, 40명씩 시 낭송을 들어 보기를 한 달 가까이 해야 하는데 머리에 쥐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10대 청소년부터 7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나와서 시를 낭송하는데 대단한 실력들이었다. 어떤 이는 1분도 안 되는 시를 낭송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10분이나 되는 시를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노래자랑은 처음 몇 소절 들어보고 땡! 하면 되지만 시 낭송은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서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해서 뽑힌 아마추어 시 낭송인은 20명이다. 1,000명중에서 20명 안에 들었으니 그 사람들이 의기양양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이 때 예선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아주 많은 이들이 나중에 정식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드디어 <시인만세> 의 막이 올랐다. 그 큰 극장에 얼마나 관객이 올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막을 올리기 훨씬 전부터 3,000석이 다 차고 보조의자를 놓아야 했다. 대박이다. 물론 입장료는 없지만, 이토록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에 우리는 매우 흥분 되었다. 제1부는 차분하게 감동적으로 진행이 되었고, 제2부 노래와 무용시간은 객석과 하나 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 제3부 아마추어 시간에 해프닝이 벌어져서 주최 측은 깜작 놀랐다. 예선대회 때 조용하게 낭송 했던 이들 중에 세 사람이 갑자기 무대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는데 웬걸 관객들이 ‘앙코르’를 외치며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객석에 앉아서 박수를 쳤던 장기영 선생은 공연이 대성공이어서 기쁘다며 격려금으로 금일봉을 주었다. 그날 참가한 시인들, 노래해준 성악가들, 춤을 춘 무용가들, 그리고 주간한국 기자들은 행사가 끝난 뒤에 을지로 입구에 있는 ‘아사원’이라는 중국음식점 2층에서 뒤풀이를 했다. 여기서 또 한번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이 일어났다.

모두들 흥에 겨워서 분위기가 익어 가고 있을 때 오페라의 대모인 김자경 선생이 “시인만세 행사가 대성공이라서 행복하다. 축하노래를 하겠다”면서, 최희준의 ‘하숙생’을 노래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그런데 김 선생보다 클래식 음악계 한참 후배인 소프라노 L 여교수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마도 클래식 가수가 대중가요를 부른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지금도 한다. 그게 그리 큰 잘못일까? 사석에서 ‘하숙생’을 부른 것이 그리 큰 잘못일까? 스승 같은 대 선배가 노래 부르는데 화를 벌컥 내고 나갈 만큼 큰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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