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e you ever seen your parents argue?"(부모님이 다투는 걸 본 적 있니?)
"Yes. I've seen parents argue many times. But I don't really know what the main topic is about."(예, 많이 봤어요. 하지만 왜 다투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How could you keep them from arguing?"(부모님이 다투면 어떻게 말렸니?)
"I should go to them and say stop fighting in front of children."(직접 다가가서 내 앞에선 싸우지 말라고 말해요.)
지난달 29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만난 김대석(12ㆍ가명)군이 이모와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이다. 기자의 요청에 대석이 이모가 '느닷없이' 민감한 내용을 물었지만 대석이는 당황한 기색 없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옆에서 물끄러미 대화 내용을 지켜보던 대석이 어머니는 연신 흐뭇한 표정이었다. '내 아들이 영어를 이렇게 잘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대석이가 한국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필리핀에서 생활한 지는 2년 반 정도 됐다.
어머니는 대석이가 마닐라의 명문 브렌트(Brent)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당초 2, 3년만 생각하고 왔는데, 한국 돌아가면 애써 체득한 영어를 모두 까먹을까 걱정"이라며 계획보다 더 머물 뜻임을 밝혔다.
대석이처럼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필리핀으로 조기유학 온 한국 학생은 해마다 늘어 현재 2만 명 정도가 체류 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입학 허가를 받고 현지에서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는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학부모들의 꿈은 '소박'하다. 오직 영어다. 진로는 나중 문제다. 6개월 전 사립학교에 입학한 5학년 딸의 영어 실력이 기대에 못 미처 속이 상한다는 한 학부모는 "영어 못하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세상"이라며 "자식들 기 안 죽고 살게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조기유학생이 밀려들자 현지 학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한국 조기유학생들이 밀집한 마닐라 알라방(Alabang) 지역에 있는 유학원과 영어학원 원장들은 저녁 때만 되면 "귀가 멍멍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걸려 온 상담 전화와 마닐라에 살면서 사설학원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의 전화가 쉴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학원을 운영하며 홈스테이 사업까지 하고 있는 A학원장 최모씨는 "요즘 하루 5, 6통 문의전화를 받는데, 성수기인 7~8월이나 12~1월이 되면 전화 받고 사람 만나다 파김치가 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조기유학 상황을 설명하던 중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부모가 "아들이 6학년인데 바로 현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묻자 최씨는 "7학년을 배정 받아야 하지만 영어실력이 안 되면 6학년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며 능숙한 말솜씨로 학부모가 궁금해 할만한 사항을 자세히 설명했다. "생활기록부, 여권 사진 필요합니다. 현지 학원에서 예비 영어교육 받으려면 하루 7시간 수업에 교재비 포함, 매달 95만원입니다. 홈스테이는 첫 달 200만원, 다음달부터는 180만원 이고요." 학부모가 학기가 시작하는 9월에 확실히 입학할 수 있냐고 재확인하자 "ESL 과정은 정원 제한이 없으니 문제 없다"고 안심시켰다. 중간에 입학해도 1년 수업료를 모두 지불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학부모는 "상관없다"며 개의치 않았다.
최근에는 직접 현지 답사에 나서는 부모가 늘고 있다. 석 달 전 중학교 1학년 손녀와 함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정착한 70대 할아버지는 "2년 전부터 필리핀의 알라방 오르티가스 세부, 말레이시아 암팡 등 안 가본 곳이 없다"며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외로움도 많이 느껴져 몇 번이나 돌아가려 했지만 손녀 장래 생각에 꾹 참고 지낼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2001년 7,944명 수준이던 우리나라 조기유학생 수는 2006년 2만9,511명으로 5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었다. 여기에 해외이주와 파견동행으로 유학간 학생까지 포함하면 2006년 한 해만 4만5,431명의 초중고생이 해외로 빠져 나갔다. 이 중 동남아로 빠져 나간 학생은 6,624명으로, 전년보다 65%나 증가해 다른 지역에 비해 상승세가 가팔랐다. 동남아 전문 유학원인 넥스굿 김용안 대표는 "강남 지역에서는 문의가 거의 없고, 분당 일산 평촌 수원 등 수도권 지역과 지방 대도시 등 중산층이 몰려 있는 지역에서 오는 문의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조기유학이 더 이상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산층과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마닐라ㆍ쿠알라룸푸르=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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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모들이 말하는 동남아 매력 '저렴한 비용'
"그러니까 1년 학비 전부 해봐야 500만원이 안 된다는 거죠?" "초등학교 6학년인데 너무 늦은 건 아닐까요?"
지난달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조기유학 박람회 현장은 자녀 손을 잡고 온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부모들은 85개 부스에서 국가별, 지역별 전문 상담원과 대화하기 위해 수십 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표정은 진지했고 30대 후반~40대 초반 여성들은 꼼꼼히 메모까지 하며 정보 수집에 열심이었다. 행사장 곳곳에서 열린 시범수업과 특강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이틀 동안 박람회를 다녀간 사람은 1만 명을 넘었다.
행사 기간 중 하루 50여 건을 상담했다는 한 유학원 원장은 "초등학교 3~5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관심이 특히 높았다"며 "조기유학 경험이 특목고 진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유학원 관계자도 "새 정부가 영어교육을 강조하면서 (조기유학에) 더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 부스 10여 곳은 조기유학과 영어캠프에 관심이 높은 '젊은 엄마'들로 붐볐다. 유학원들은 "비용이 싸고 안전하다" "1대 1 수업이 가능하다""한국 사람들이 대우 받는다"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왔다는 주부 김모(38)씨는 이미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두 아들을 조기유학 보내기로 결심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김씨는 "빠르면 6월 말쯤 필리핀 마닐라 알라방 지역으로 건너가 3~4개월 아이들을 어학원에 보낸 뒤 바로 현지 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필리핀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비용 때문"이었다. 김씨는 "따져 보니 캐나다 유학 비용의 절반 수준으로 1대 1 수업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동남아 유학을 결심하는 이유는 비용 외에 '영어 스트레스'도 한몫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말레이시아의 한 국제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는 안모(37)씨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아이가 영어라도 잘 해야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너무 오래 있으면 한국에 돌아와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 2~3년만 머물 계획"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 중학생의 조기유학이 금지돼 있다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 안씨는 "교육청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코웃음 쳤다. 경기 일산에서 온 한 학부모는 "누군들 보내고 싶어 보내겠나. 영어캠프는 기본이고 너도나도 조기유학을 가는데 내 아이만 뒤쳐지게 할 순 없다"며 "없는 살림에 그래도 1, 2년 보내면 부모 노릇 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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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서 유학원 운영 김세수씨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세수(사진) 원장은 "새 정부 출범 후 조기유학 문의가 부쩍 늘었고,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도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년 이상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며 현지 한인학교 교장을 지냈다.
매일 한국의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는 그는 "최근에는 주말을 이용해 현지 답사차 직접 찾아오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 지난 주말(6~8일)에도 몇 분 다녀갔다"며 "울릉도만 빼고 전국 각지의 학부모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조기유학 열풍을 전했다.
김 원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중학생이 조기유학의 주류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초등학생"이라며 "한국 학부모들이 되도록 어릴 때 영어를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현지 국제학교조차 '머리 굳은' 고등학생은 가급적 받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한국 학부모들 사이에 동남아 지역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그는 "비용 문제"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비용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다 보니 한국에 있을 때 학생들의 성적은 천차만별이라고 전했다. 수요가 넘치다 보니 좋은 학교는 자리가 없어 대기해야 하고, 일부 학교는 한국 학생을 더 이상 안 받으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김 원장은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에도 불구, 조기유학 수요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영어의 중요성만 부각돼 문의가 더 늘었다. 김 원장은 "영어 잘하는 게 1차 목표지만 한국에서 좋은 대학 졸업해도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부모들이 장기계획을 세워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한국 정부 입장에선)이게 더 큰 문제 아니냐"고 반문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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