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입학한 고등학교에 함께 공부했던 선생님이 근무하고 있지만 나는 전화 통화 한 번 하지 않았다. 내 딸에게 특별히 잘해 줄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내 딸의 학교생활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1, 2학년 때 한 두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본 것 이외에는 나도 내 아내도 학부모 총회일 이외에는 학교를 방문하거나 전화를 해 본 경우가 거의 없다. 종업식 졸업식 때 아주 작은 선물 말고는 선물이라며 준 일도 없다. 그럼에도 아들과 딸은 정말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주었고 공부도 기대 이상으로 잘 해 주었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친구의 아들이 세 명이나 다니지만 난 그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 입학 직후에 불러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면서 고민되는 일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했고, 오다가다 만나면 어깨 두들겨 주는 것이 전부다.
작년과 재작년에 고3 담임이었다. 재작년에는 딱 한 분의 학부모님께서 찾아왔지만 작년에는 한 분도 찾아오지 않았다. 학부모총회 때 말고는 졸업식 전 날까지 나는 반 아이의 학부모님을 한 분도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 모든 상담은 전화로 충분하였다. 상의할 일 있으면 전화나 전자메일로 해 달라고 학년 초 편지를 통해 간절하게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반 아이들의 대입 성적은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아주 좋았다. 성적 뿐 아니라 인성이나 가치관도 아름답게 가꾸어졌다고 생각한다.
예외가 있겠지만 교사로서 특정 학생에게 특별히 잘해 줄 그 무엇은 없다. 있다면 미워하지 않는 일일 텐데,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자를 이유 없이 미워할 선생이 있을까? 잘못을 저질렀다면 지적해 주고 시정을 요구해야 하는데 부모의 관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이가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해 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면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어리석음 아닐까?
베이컨은 말 때문에 생기는 편견을 ‘시장의 우상’이라 하였다. 시장에 떠돌아 다니는 말이 진리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라 착각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아 보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준 것만큼 받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라고 외치니까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사가 특정 학생에게 잘해 줄 그 무엇은 분명히 없다. 나는 그런 선생을 본 적이 없다. 잘해 줄 그 무엇이 있어 특별 대접을 받는다면 과연 그 아이에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미래는 물론 현재에도 분명히 손해다. 왕따의 요인까지 될 수 있다.
공부는 학생이 하는 것이지 부모나 교사가 하는 게 아니다. 칭찬도 아이가 받아야 하고 야단도 아이가 맞아야 한다. 부모의 능력이 아니어야 하고 부모 책임이 아니어야 한다. 교사의 양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마보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기회를 빼앗아 버린 부모 책임이고, ‘왕따’ 역시 부모의 책임인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고치 속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단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워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더니 방구석을 돌아다닐 뿐 가엾게도 날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고치의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고통을 겪으면서 날개 근육에 힘이 생기는 것인데 그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도와 주지 말고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처가나 화장실이 멀어야 하는 게 아니고 교사와 학부모 사이가 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권승호 전주영생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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