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인 평론가 박혜경(48)씨에 대한 시상식이 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팔봉비평문학상은 한국 근대 비평의 개척자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ㆍ1903~1985) 선생의 뜻을 기려 유족이 출연한 기금으로 1989년 한국일보가 제정해 이듬해부터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왔고, 지난해부터 KT&G 후원으로 상금을 1,000만원으로 올렸다. 박씨는 올해 제정 20주년을 맞은 이 상의 첫 번째 여성 수상자다.
심사를 맡았던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시상식에서 “작품 디테일에 함몰된 해설비평이 문학비평의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박씨는 수상 평론집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를 통해 우리 문학의 핵심을 잘 짚어내는 견실하고 정련된 비평가적 안목을 보여줬다”며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오르페우스의>
축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신진 평론가를 상대로 한 비평문학상에선 여성 수상자가 선정된 바 있지만, 문단 전체를 아우르는 본격 비평상에서 여성이 수상한 것은 처음인 듯하다”며 “90년대 이후 한국 비평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여성 평론가들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혜경씨는 젊은 여성 평론가 그룹을 대표하는 맏언니이자, 현상 분석을 통해 차근히 작품 구조와 그 문학적 의미를 해명하는 ‘공감의 비평’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팔봉상 운영위원인 문학평론가 김치수씨는 “올해는 상 제정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작년 KT&G에서 기금 1억을 후원해줘서 전통과 상금 규모 면에서 두루 최고 수준의 비평상으로 거듭났다”며 상 운영 현황을 밝혔다.
박씨는 수상 소감을 통해 “문학을 간절하고 신비롭게 여겼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곱씹고 있는 요즘, 수상 소식은 내게 현실의 남루를 견디고 문학의 일용할 고통과 우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라는 격려의 의미로 여겨진다”면서 정진을 다짐했다.
이날 수상자에겐 상금 1,000만원과 상패와 더불어 팔봉의 장녀 김복희 여사가 마련한 순금 메달이 수여됐다. 시상식엔 심사위원 김윤식 김인환씨, 평론가 홍정선 황종연 김미현씨, 시인 황인숙 조은 이원씨, 소설가 신경숙 김형경씨와 채호기 문학과지성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
■ 박혜경씨 수상소감 "초심으로 현실의 남루·불행 더 견디라는 격려"
살아가는 일이 힘에 부칠 때마다 삶에 대해 품고 있는 욕심의 양을 조금씩 줄여가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욕심은 늘 내게 앞만 보고 내달리는 숨가쁜 삶을 주문해왔지만 매번 내 발길을 멈춰 세우는 것은 낭떠러지처럼 아슬아슬한 존재의 위기감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가파른 고갯길에 몸과 마음을 간신히 부려놓고 있는 듯한 피로가 찾아드는 시간, 나는 마음의 휴식을 갈망하는 심정으로 문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시절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한다. 문학이 손닿지 않는 곳의 신기루처럼 아스라했던, 그래서 더 간절하고 신비롭게 여겨졌던, 지금 생각하면 참 전설 같은 시절이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마치 내 마음에 거는 주문처럼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참으로 상투적인 생각이지만, 때로는 그 상투적인 갈망이 나를 마음속에 뒤얽힌 욕망의 진창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마음의 갈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시절은 글을 쓰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밖에는 없던 시절이었지만, 어쩌면 이것도 욕망의 진창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현재의 욕망이 만들어낸 과거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록 허상일망정 돌아가 마음을 누일 그 순수의 자리라도 품지 않으면 어떻게 이 현실의 남루를 견디겠는가?
초심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우울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나에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소식은 기운을 내서 이 현실의 남루를 더 견뎌보라는 커다란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어차피 문학이란 이 들끓는 세속적 욕망의 세계에서 모두가 자기 몫의 행복을 챙기기 위해 분주한 시대에 남루와 불행을 기꺼이 자기 삶의 몫으로 선택한 자들의 거처일 테니 문학의 일용할 고통과 우울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아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저 '뜨거운 상징'으로서의 문학의 자리를 꿈꾸며, 가라앉는 마음을 추슬려 또 끄덕끄덕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테다. 이 가련한 영혼의 등을 힘차게 떠밀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는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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