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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아니었다면 지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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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아니었다면 지킬 수 없었다

입력
2008.06.0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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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문화재지킴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6ㆍ25때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지켜낸 장지량(84) 전 공군참모총장, 일본에서 북관대첩비를 반환받은 초산(78) 스님, 경복궁 자선당 유구를 일본에서 찾아낸 김정동(60) 목원대 교수….

외침과 전란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이들과 그 후손들이 5일 경복궁내 고공박물관에서 이건무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ㆍ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우리문화재를 지켜낸 인물들과 그 사연을 기록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이야기> 를 발간하면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은 노구를 이끌고 나와 50여년 전의 일을 회고했다. “1951년 8월 인천상륙작전 직전 우리는 경남 사천비행장에서 작전중이었습니다. 인민군 1개 대대가 합천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으니 빨리 폭격하라는 명령이 미군 비행고문단으로부터 떨어졌습니다.” 당시 공군 중령으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였던 그는 해인사에는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돼 있는데 공중폭격을 하면 해인사와 함께 고려대장경판도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의로 출격을 지연시켰다. 미군 고문단 대위가 출격을 독촉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일본의 문화재가 많은 교토(京都)는 폭격하지 않는 사례 등을 들어가며 출격을 거부했다. 2,3일 후 인민군들이 해인사에서 식량을 갖고 철수하자 뒤쫓아가 폭격을 해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일로 장 전총장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당시 미군의 보고를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격노해 저를 총살도 아니고 대포로 쏴 포살(砲殺)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저의 해명을 듣고 이 대통령에게 전했더니 오히려 칭찬을 해 지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한 비가 북관대첩비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해둔 이 비는 독립운동가 조소앙(1887~1958) 선생에 의해 알려졌다가 잊혀진 후 초산 스님 등의 노력으로 2005년 국내로 반환돼 보존처리를 마친 뒤 현재 북한 함경도 김책시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워져 있다. 초산 스님은 “반환운동 당시 정부에서는 외교마찰을 우려하며 오히려 말리기도 했지만 민간 차원의 노력으로 성사가 됐다”면서 “북관대첩비 반환은 남북간의 민족적인 총화에 의해 이뤄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감회를 밝혔다.

김정동 교수는 1993년 일본 도코대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 현 오쿠라 호텔에 방치돼 있는, 조선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인 자선당의 유구를 확인해 널리 알림으로써 유구가 국내로 반환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도 6ㆍ25 당시 화엄사를 태우라는 명령을 거부해 화엄사를 지킨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1920~1958)의 아들 차길진씨, 조소앙 선생의 며느리 안종덕 여사, 독도의용수비대원 하자진 최부업씨 등 문화재지킴이들의 후손과 관계자들이 감사장을 받았다.

이건무 청장은 “좀더 일찍 문화재를 지킨 공로에 감사를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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