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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3> 암울한 현실 속 영화계 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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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3> 암울한 현실 속 영화계 활기

입력
2008.06.09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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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내 나라 한국. 암울했던 1969년 겨울. 외국에서 보았던 밝은 햇살과 행복한 웃음소리는 우리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68년 북한의 무장 게릴라 124군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으로 군복무기간은 6개월이나 연장되고 북한과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터질 듯한 긴장감만 사회 분위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영화계는 나름대로의 활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둡고 억눌린 사회적 현상을 한 가정의 불륜과 갈등이라는 방정식으로 풀어 낸 최루탄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으로 ‘대박’이 터졌다.

나는 짐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영화현장으로 불려나갔다. 국내영화 첫 출연 작품은 김기 감독의 <울지도 못합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의 아류작 같은 것이었다. 상대역은 <미워도 다시 한번> 의 주인공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문희. 작품은 계속 밀려왔다. 정승문 감독의 윤정희가 상대역인 <누야 와 시집 안가노> . 조문진 감독 김수현각본 신영균, 문희가 상대역인 <약속은 없었지만> 등등.

당시 최고의 남자스타는 신영균과 신성일이었다. 여자스타는 소위 트로이카로 불렸던 문희, 남정임, 윤정희. 이 배우들의 스케줄에 의해 한국영화의 제작일정과 극장개봉 일정이 결정됐다. 제작부는 이 스타들의 하루 스케줄을 몇 등분으로 나누어 써야 했다.

무리한 스케줄 조정의 부작용으로 가끔 주먹 힘이 동원될 때도 있었다. 당시 충무로에는 <5형제>라는 자유당 때부터 내려온 제작부장들이 아직 남아서 조율을 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 ‘임화수’ 같은 폭력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외국에서의 체계적 일정에 의해 일을 하던 나로서는 주먹구구에 가까운 충무로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문희는 KBS-TV 동기생이고, 윤정희 역시 데뷔 때부터 안 사이여서 서로의 스케줄을 잘 조율할 수 있었다. 이어 상복이 터지기 시작했다. <누야 와 시집 안가노> 로 <청룡상 신인상> , <약속은 없었지만> 으로 <한국일보 신인상> , 백마상, 핑크 리본상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영화가 개봉되면 주연 배우들이 전국을 돌며 무대 인사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통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없었고 열차나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지방 순회시엔 현지에서 1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마다 관객들의 반응도 독특해서 가령 경상도 관객들은 무대인사와 함께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나면 꽃다발을 들고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다음 진행이 여의치 않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울지도 못합니다> 가 부산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였다. 꽉 찬 관객, 우레같은 박수를 받고 어쨌든 무대 인사를 무사히 마쳤다. 몹시 피곤한 상태라 중심지를 빠져나와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일찌감치 잠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인기척에 놀라서 눈을 떴다.

한 여자가 내 머리맡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그녀는 호텔직원에게 방 키를 구하여 침입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아주 흔했는데 요즘 스타들이 수많은 매니저들의 경호를 받으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옛 생각이 나곤 한다. 사고도 많았지만 인의 장벽 없이 관객과 소통하는 행복도 느낄 수 있던 때였다.

당시 여배우들은 수난의 시대였다. 총칼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여배우들을 마치 그들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중앙정보부를 시켜 불러 들였다. 숱한 여배우들이 그들에 의해 놀아났고 촬영현장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못 했다.

한 여배우가 촬영을 펑크 냈다. 내 스케줄이 꼬이기 시작했다. 매니저도 없는 나로서는 앞이 캄캄했다.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족들은 그녀가 며칠 째 식사도 안하고 방문을 잠그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든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방을 두드렸다. 잠시 후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 간단한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바람이나 쏘이러 가자고 하였다. 나는 그녀를 내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겠냐고 묻자 그녀는 무작정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청평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는 한산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멀리 호수가 보였다. 그녀는 보트가 타고 싶다고 했다. 초겨울이었다. 호숫가 주변에선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이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트를 빌렸다. 나는 그녀를 태우고 천천히 호수 한 복판으로 노를 저었다.

겨울바람에 그녀가 몹시 추워 보였다. 내 겉옷을 건네자 그녀는 반쯤 웃으며 거절했다. 그리곤 그녀가 노를 젓겠다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녀에게 노를 건넸다. 그녀가 노를 천천히 저었다. 문득 그녀의 몸에서 온기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정말로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 나도 그녀를 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이미 혼수 상태였다. 수영에 익숙치 않은 나는 그녀를 껴안고 허우적대며 ‘사람 살려’라고 외쳤다. 그녀와 나는 거의 실신되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모터보트 소리가 들려왔다. 검정색 점퍼 차림의 몇 명이 모터보트에서 뛰어내려 우리를 구조해 주었다. 뭍으로 나온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우려 하였으나 그 검정 옷차림의 남자들이 앞을 막았다. 그들이 그녀를 집에 태워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승강이를 할 사이도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태우고 사라져갔다.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끼쳤다.

며칠 후 그녀와 촬영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그날 일을 감사해 했다. 나는 웃으며 그녀와의 촬영을 마쳤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에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파증불고(破甑不顧)라는 말이 있다. ‘깨진 시루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둡고 암울했던 그 시절은 우리에겐 깨진 시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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