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친누이에게 연심(戀心)을 품는 사내가 있을까? 사람도 갖가지고 마음의 흐름도 온갖 방향일 테니, 그런 사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친오누이끼리도 섹스를 하던 혈연가족시대가 인류에게는 있었다. 공동남편들과 공동아내들이 동시에 형제자매들이기도 했던 아득한 시절 얘기다.
자연의 섭리에 따랐든 문화의 명령이 개입했든, 언젠가부터 오누이 사이의 연애는 금기시되었다. 오늘날의 사내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누이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성싶다.
연애라는 게 당사자 둘만의 내밀한 융합이긴 하지만, '제대로' 사회화한 사내라면 세계와의 융화 속에서만 그 은밀한 융합을 시도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혹 누군가가 제 누이에게 연애감정을 품게 됐다 하더라도, 제 삶을 혼란에 빠뜨리고 궁극적으로 파괴할지도 모를 그 사랑을 감히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용서못할 금기가 된 근친상간
누이와의 비릿한 관계를 털어놓은 니체의 유고들이나 근년에 국제 언론의 눈길을 끈 '라이프치히 오누이 결혼 사건' 같은 것들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누구에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끼리는 절절할 그 사랑을 두고 사람들은 비속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어!"라고 고개 젓는다.
굳이 이해를 하자면, 근친상간은 혈육의 거푸집에 갇힌 자기애일 것이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 생명의 방출인 사랑을 더 멀리, 더 넓게 뻗치지 못하고 제 핏줄 안에서 맴돌다 움츠러들 '열등' 개체들을 '위대한' 인간종족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까?
연애감정으로 탈바꿈하지 않은 오누이 사이의 의초도 연애감정 못지않게 절절할 수 있다. 극작가 소포클레스와 장 아누이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주기 위해 제 목숨을 건 안티고네 이야기를 통해, 연애감정을 뛰어넘는 오누이간의 강한 결속감과 명예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신라의 승려 월명 역시 죽은 제 누이를 '한 가지에서 떠난 사람'이라 일컬으며 오누이 사이의 굳건한 육친애를 발설한 바 있다. 연인이나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지만, 오누이는 그렇지 못하다. 오누이라는 남녀의 연대는 피의 연대다. 월명의 그 유명한 <제망매가> ( <누이제가> )를 읽어보자. 누이제가> 제망매가>
"생사 길이란/ 여기 있으려나 있을 수 없어/ 나는 간다는 말씀도/ 이르지 못하고 가버리는가/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떠나선/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야/ 미타찰에서 만날 것이니/ 내 도 닦아 기다리리라."(홍기문 역)
동기(同氣)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슬픔이 화자의 살을 에는 듯하다. 특히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떠나선/ 가는 곳 모르는구나"라는 구절에선 삶의 덧없음과 인간의 무력함, '한 가지에서 떠난 사람'을 잃은 극한의 상실감이 몸뚱이 가장 깊은 곳까지 사무친다. 연애감정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았을 구도자 사내의 마음을 이리 흩뜨려놓을 만큼, 누이는 도무지 마음을 다스려 지울 수 없는 절대적 존재였던 것이다.
누이가 등장하는 또 다른 시,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에서 누이는 그저 우애의 대상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관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이 시에서 누이는 중성에 가깝다. 그 누이는 붉어지기 시작하는 단풍에 경탄하는 화자의 정겨운 동기(同氣)일 뿐, 딱히 이성은 아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감탄에서 드러나는 호들갑스러움이 설령 여성적 특질이라 하더라도, 화자는 이 시에서 '누이' 대신 '사내아우'를 들먹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래로 더 잘 알려진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에서도 누나는 무성(無性)에 가까운 가족일 뿐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강변이 화자가 상상하는 이상적 거주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의 행복한 삶에 누이와의 근친애가 개입돼 있는 건 아니다. 화자가 어린아이로 설정돼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런 한편, 형제가 아니라 누이를 불러냄으로서, 이 시들의 정취는 사뭇 애틋하고 정겨워진다. 오누이는 실로 로맨틱한 혈연이다. 사내가 누이에게 품는 육친애, '성적 욕망이 배제된 육정(肉情)'이라 할 만한 그 애틋한 정조를 동성 형제들은 결코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누이를 성적 기호로 삼아 연애감정을 슬쩍 내비치고 있는 것은 고은의 초기 시들이다.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한 겨를의 실크빛 연애(戀愛)에도/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을/ 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폐결핵> )거나, "서서 우는 누이여./ 너의 비치는 치마 앞에서 떠난다.// 너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서/ 새로 떠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작별> )거나, "네가 자라서 부끄러우며 울 때,/ 나는 네 부끄러움 속에 있고 싶었네./ 아무리 세상에는 찾다찾다 없어도/ 너를 만난다고 눈 멀으며 쏘아다녔네" ( <누이에게> ) 같은 구절들에서, 화자는 누이를 내밀한 연애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누이에게> 작별> 폐결핵>
그러나 이것은, 시의 화자와 달리 정작 시인에게는 누이가 없어서 생긴 판타지이기 쉬울 것이다. 시인에게 실제로 누이가 있었다면, 어려서부터 함께 지지고 볶던 친누이가 있었다면, 이런 연애감정이 생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개연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다. 시인은 제게 없는 누이를 상상하며, 그 누이와 연애하고 있다. 청년 고은은 상상 속의 누이와 정신적 근친상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밀한 근친애 다룬 작품도 다수
오누이가 어려서부터 떨어져 자랐다거나, 사촌 이상의 사이라면 연애감정이 생길 수도 있겠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 에선 내외종간인 알리사와 제롬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지드 자신도, 열정이 이내 시들었지만, 외사촌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했다. 좁은>
통속 드라마들에도, 어린 시절 헤어져 살다 나중에 서로 친오누이인 줄 모르고 결합한 부부의 비극이 더러 보인다. 낯모르는 사람한테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끼고 급속히 끌린다는 건 그럼직한 신파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근친상간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라는 점에서, 외설이고 퇴행이고 신파다.
이 신파를 미연에 방지하자면, 되도록 먼, 다른 형질의 존재에 홀리도록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할 터. 그것이 섭생의 길이다. 그 옛날 솔로몬이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아가 4:10)라고 노래했을 때도, '누이'는 연인의 은유였지 실제로 제 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특정한 문화권의 특정 계급에선 근친혼이 드물지 않게 이뤄졌지만, 오늘날엔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늘 뜻밖의 주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혐오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욕망 때문에 생긴 것이다.
프로이트, 억압된 욕망 이색해석
근친상간 금지는 억압된 근친상간 욕망에 대한 죄책감의 필연적 표현이라는 얘기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인류보편의 무의식으로 여기는 프로이트로서야 내세울 법한 주장이지만, 동아시아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근친상간 자체는 처벌되지 않는다. 법은 개인들의 자발적 성생활에 간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친 사이의 결혼은 금지돼 있다. 가깝지 않은 친척끼리의 결혼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허용된다.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내 엘리노어는 남편의 13촌 조카였다.
다시 누이로 돌아가자. 친누이든, 배다른 누이든,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상상하는 사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촌누이에 대해서는 그런 상상을 하는 사내가 적잖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삼가는 게 좋겠다. 연애나 섹스는 사랑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누이와 연애를 하지 않고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
누이와 관련된 말 몇 마디. 누이바꿈은 두 사내가 제가끔 상대방의 누이와 결혼하는 것을 가리킨다. 전통사회에선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한다. 이리 되면 누이가 처남댁이 되는 셈이다. 움누이는 시집간 누이가 죽고 매부가 다시 맞은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움딸은 시집간 딸이 죽고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든 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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