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창간 54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난 한국일보는 그동안 불편부당의 자세로 한국언론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급변하는 언론환경 속에서 한국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은 출혈경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뉴미디어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 속에서 국내 신문산업이 처한 현실을 진단해보고 한국일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김은미 연세대 교수, 최민재 언론재단 연구원이 논의했다.
국내신문 너무 政派化, 신뢰 상실뉴미디어시대 전략 세분화부터新-放 겸영, 맹목적 대세론 경계고유색깔 유지 속 정보 고급화 필요
사회= 신문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재경(이)= 국내 신문은 정파화가 너무 심해 독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예컨대 최근 논란이 되는 광우병에 대해서도 핵심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다루었다. 언론들이 입맛에 맞는 기사만 뒤쫓다보니 정작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정부 감시 기능을 놓쳤다. 한미협상 과정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다룬 언론은 없었다.
김은미(김)= 신문의 위상이 추락한 것은 일차적으로 신문사 자체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포털로 대표되는 대안 저널리즘이 부상하게 된 데에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 때문이라기보다 기존 신문들이 이를 안이하게 생각해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민재(최)= 한국 신문들이 갖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전략 부재다. 5년 후, 10년 후 우리 신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전략이 없다.
장기적으로 많은 독자를 얻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하고, 어떤 독자층을 메인으로 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종합지고 전국지다 보니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계층을 독자로 생각해서 기사를 만들다보니 방향을 못 잡는다. 작은 독자층 대상으로 해서 그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기사생산 전략도 과감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
사회= 인터넷 포털 등 뉴미디어의 발전이 눈부시다. 신문은 장기적으로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김= 언론사 입장에서 시장에 대응하는 포지션 전략보다는 내부 구성원들 간 현재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방송의 경우 정책기획실 등에서 보고서를 만들고 검토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내용이 부서 안에서만 돌고 구성원들에게 확산되는 과정이 없다는 점이다. 현 상황에서 우리의 위치나 향후 나아갈 방향을 구성원 내부에서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는 연구 기능을 하는 조직이 없다. 경영, 기술, 동영상의 문제 등 많은 변인들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시점에서 연구 기능은 필수적이다. 장기적으로 이슈를 정리하고 풀어나가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 동시에 신문기사도 바뀌어야 한다. 심층성은 인쇄매체의 가장 큰 무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쇄매체가 충분한 잠재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은 100년 전 뉴욕의 상황과 비슷하다. 10여개의 신문이 출혈경쟁을 했으나 깊이 있는 기사를 다루는 NYT만 살아 남았다.
최=신문은 인쇄매체의 대표주자로 청소년의 글 읽는 습관 유지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신문기사는 정제된 내용으로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의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화되는 소재들이 다양화되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김= 신문 콘텐츠가 포털로부터 제대로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포털 등 전달매체에서 돌아다니는 콘텐츠는 기존 신문사가 만들어낸 기사를 바탕으로 거기서 파생된 이야기들이다. 때문에 언론사가 콘텐츠 생산자로서 가치는 더욱 커진다. 그런데도 한국의 언론사들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얹혀 간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실험적 시도가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할 수 있는 실험적 시도를 해야 한다.
최= 현재 신문사끼리만 경쟁하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 산업 전반의 지형이 바뀐 것을 못 읽고 있다. 미디어의 큰 틀에서 현재 신문의 위치와 또 그 속에서 우리 신문의 위치를 세분화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일정 정도 규모의 경제를 상정해 놓고 목표를 이뤄나가는 방법도 필요하다. 포털 뉴스 사이트에서 매체별 뉴스 경쟁력을 보면 방송은 동영상, 통신은 속보성, 인터넷신문은 주장의 선명성이 부각된다. 지금 상황에서 신문은 통신사의 뉴스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경쟁하고 있다. 남아있는 부분은 심층성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신문은 심층성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네티즌들의 전문성을 활용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각 분야갬?전문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강세인 이유 중에 하나가 대부분 외주에서 제작한다는 점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경쟁력을 쌓았다. 신문사도 외연을 넓혀 외부에서 수혈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사회= 신문사들 경쟁도 치열하다. 어떤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가.
이= 미국신문은 기사 길이가 한국신문보다 길면서도 일주일 동안 쓰는 기사량은 비슷하다. 심층성이 다르다는 의미다. 우리도 그런 시도를 해서 독자의 만족감을 높여야 한다. 그게 차별화 전략이다.
김=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탐사기획이란 이름으로 많은 시도를 하지만 옳게 가는 것인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탐사보도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에 따른 독자 선호도 등 자료가 축적이 안 돼 있으니 탐사보도에 대한 역량이 쌓일 틈이 없다.
사회= 일부 신문들을 중심으로 방송 겸영을 추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신문-방송 겸영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이= 논쟁 자체가 정파화 됐다. 시장 논쟁과 공영 논쟁이 정략적인 접근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신ㆍ방 겸영은 작은 문제다. 방통융합을 비롯한 미디어 전반의 통합을 봐야 한다. 현재로서는 통신이 통째로 미디어 시장을 장악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신문의 포지션은 의미 없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편으로 신문이 굳이 방송에 진출할 것이 아니라 사이즈를 키워 제대로 된 취재망을 갖춘다면 새로운 시장도 얻을 수 있다.
최= 겸영이라고 했을 때, 사회적 여론 독과점 시각보다는 IPTV(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TV)로 인한 미디어 전체 융합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 신문도 거기 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긍정적 결과를 낳을지는 미지수다. 지금으로서는 전체 신문사의 장기 비전을 봤을 때 접근해 봐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김= 정치권 등에서는 신문방송 겸영이 대세라고 하면서 해외 사례를 든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회 구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단순 논리로 대세라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 번에 확 풀어주는 식의 신문 방송 겸영은 문제가 있다. 융합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갈 수 없지만, 여론 측면에서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회= 한국일보의 매력은 무엇인가. 또 조언을 한다면?
이= 과거 장기영 사주가 진행한 혁신적 조치들이 한국언론계에 중요한 구조변화를 만들어냈다. 편집국은 항상 토론이 이어졌다. 인재산실의 장이 됐고, 한국 저널리즘의 스탠다드를 만든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 한국일보다. 그만큼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방향타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또 지금은 신문들이 독자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더 많이 해 줄 때다. 뉴욕타임스는 많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어떤 시각에서 썼는지 등을 설명한다. 한국일보도 이 기사가 이런 과정을 거쳐 판단했다는 표현을 독자들과 소통하면 좋겠다.
김= 한국일보는 그동안 쌓아놓은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양질의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관문을 믿지 않으면 필요 없는 정보가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일보 브랜드는 양질의 정보를 더욱 고급화할 수 있는 자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최= 독자들은 이제 신문사든 방송사든 어느 매체가 어느 사건을 어떤 식으로 보도할지 대충 알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한 여론형성이 어려운 것은 언론매체가 특정 논조, 시각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의견과 소화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게다가 서울경제신문, 코리아타임즈, 소년한국일보 등 국내 자매지와 미주한국일보도 큰 자산이다. 판매망을 보완하고 자매지 및 온라인을 활용하면 새로운 언론 모델의 틀을 제시할 것으로 본다.
정리=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대담= 최진환 사회부 전국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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