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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 장정이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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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 장정이전의 역사

입력
2008.06.0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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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발 상하이(上海)행 비행기. 비행기속에서 상하이,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난창 (南昌)을 중국현대사와 연결시켜 생각해봤다. 청나라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의 제국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1912년 멸망했다.

이후 중국은 각 지역을 지배하는 군벌들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쑨원(孫文)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서구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1912년 국민당을 창설했다.

한편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성립됐고 국제공산당본부(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국민당과 국공합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져 국민당의 장제스가 교장으로 취임했고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초빙됐다. 젊은 공산당원들도 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실세가 된 장제스는 1927년 군벌들을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들어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다. 수십만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이를 돕기 위해 총파업에 들어가 "장제스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상하이의 갱 두목이자 악덕 매판자본가과 뒷거래를 했고 장제스가 방조하는 가운데 갱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사라졌다. 역사적인 4.12학살이었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운동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은 반작용으로 무장투쟁이라는 좌파노선으로 선회했다. 그 첫 작품이 난창봉기이며 두 번째 작품이 추수폭동이다. 1927년 8월 난창 공안국 국장인 주더(朱德)가 국민당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초대해 발을 묶은 가운데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격파하여 난창을 장악했다.

그러나 광둥(廣東)으로 진군해 혁명근거지를 만들려는 계획은 이동 중 국민당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실패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에게 고향인 후난(湖南)에서 추수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9월 마오의 후난병력은 일부 소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피해도 컸고 목표한 창두(成都)ㆍ창사(張沙)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오는 후난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상하이의 두 얼굴

상하이는 중국 '붉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오랜 조차지였던 역사적 유산에 기초해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을 능가하는, 아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카이라인과 와이탄(外灘ㆍ해변가에 자리잡은 상하이의 유서깊은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이를 증언해준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 사회주의의 상징이자 메카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곳이 바로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하이의 선진적 노동자들은 1920년대 투쟁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중심적인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이 점에서 상하이는 상반되는 '두 개의 얼굴'을 한 도시이다.

1921년 7월23일. 마오를 비롯한 13명의 사람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내에 있는 한 이층건물에 모였다. 53명의 공산당원들을 대표한 대의원들로 이들은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30일 이 같은 모임을 냄새 맡은 경찰이 수색에 들어갔다. 이들은 급히 피해 인근 호수의 유람선에게 창당선언문을 낭독했다. 마침 제1차 전대 회의지에서는 저우언라이 회고전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성지답게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13명의 대의원들이 회의를 하던 방은 촬영이 금지돼 있었으나 사무실에취재목적을 설명해 촬영을 허락 받았다. 사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 장정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세력인 4방면군 사령관으로 장정의 방향과 관련해 마오와 갈등을 벌렸던 장궈타오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결국 당내 소외세력이었던 마오와 당내 최고엘리트였던 장궈타오가 장정을 놓고 갈등을 겪고 결국 마오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엄습한 것은 혼란감이었다. 이 유적 바로 옆에 파리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카페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의 최고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코앞에 이 같은 카페촌을 만들도록 허락한 중국. 이를 실용주의라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실 제 1대 전대 회의지와 카페거리 신천지, 이처럼 현재의 중국의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즉 지척에 위치한 이 두 곳의 공존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자본주의 못지않게 시장경제를 추진해 가고 있는 소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하이의 최고 매력은 와이탄의 야경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은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걸, 조명이 다 꺼져서 죽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지난 구정의 폭설로 발전과 송전에 문제가 생겨 관광객이 많은 주말만 조명을 켜고 주중에는 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불이 꺼져 황량한 와이탄거리의 모습이야 말로 환경오염과 에너지난에 봉착한 세계의 불안한 미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폭설의 경우 결국 환경오염에 따른 기상이변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상이변은 전력난을 낳았다.

어디 전력뿐이랴. 고갈의 위기에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석유값은 또 어떠한가. 사실 이 같은 에너지, 그리고 천연자원 문제 때문에 중국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중앙아시아 등 에너지와 자원강국들로부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방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의 석유와 에너지의 소비량은 앞으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국, 나아가 세계의 에너지난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 뻔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색상으로 원을 그린 천장과 벽.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거대한 소총.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해, 포스트모던한 팝아트 설치 미술의 한 장면이었다.

다음 날 난창봉기 기념관을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충격적이게도 이 같은 형상이었다. 공산당의 혁명유적 기념관이니 당연히 무겁고 칙칙한 사실주의적 조형을 기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창봉기는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배반당한 뒤 행한 첫 무장봉기이다. 따라서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한 조형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말이었다.

조형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오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말이 잘못 인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마오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나 의회와 같은 민주적 정치를 혐오하고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곤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그 같은 발언이 나오게 된 맥락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오는 이 발언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의해 국공합작을 배반당하고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결정한 우한(武漢)회의에서 했다.

따라서 그 말은 피의 희생의 생생한 체험에 기초해 평화노선은 적의 폭력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을 가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현실분석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거꾸로 선 장총 조형물을 보면서 역사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가 결국 승리하며 비폭력의 힘이 폭력보다도 더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규범적으로는 폭력이나 이에 대한 대항폭력(난창봉기식의), 나아가 비폭력을 넘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반폭력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현실을 알수록 역사에 있어서 폭력의 힘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자신이 없어진다. 고대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같은 무장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운동만 했다면, 그리고 중국의 농민들이 공산당의 지도아래 홍군을 조직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면, 노예의 사슬과 오랜 봉건적 수탈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 별로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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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934년 10월 16일 저녁. 마오쩌둥(毛澤東)과 농민들로 구성된 8만5,000명 홍군은 횃불을 들고 중국 남부 장시(江西)성의 작은 도시인 위두(于都)를 떠나 긴 도피 여정에 들어갔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을 피해 역사적인 1만km의 장정을 떠난 것이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을 선언했다. 반면에 장제스는 살아남은 60만의 병력을 싣고 대만으로 도주해야했다. 이로부터 다시 59년, 따라서 장정으로부터 74년이 흐른 2008년 현재. 중국은 미국, 일본에 이은 세계의 3대 경제대국으로 웅비하고있다. 그리고 이같은 웅비의 상징으로 유치한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물론 티베트사태와 쓰촨·四川지진으로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지만).

그리고 앞으로 26년 후이자 장정 100주년이 되는 2034년에는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또 앞으로 41년 후이자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론 조만간 중국이 위기에 부딪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기는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체제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현재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장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정은 현대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다.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면서도 왜 자신들의 체제를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라며 사회주의라는 말을 고수하는지, 또 왜 공산당이라는 사실상의 일당체제를 계속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장정은 그 자체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 드라마이다. 적에 쫓기고 해발 5,000m의 설산과 죽음의 늪지대등자연과 싸우며 중국의 오지를 헤매면서도 치열한 내부 투쟁을 해야 했던 장정의 이야기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한 연구자가 잘 지적했듯이 셰익스피어조차도 결코 쓸 수 없는 극적인 드라마이다.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황토고원의 산시(陜西)성에 도착해 국민당군 추격대를 몰살시킨 1935년 10월 18일까지 368일동안 24개의 산을 넘었고 해발 4,000m 이상의 만년설산 5개를 포함해 18개의 산을 넘었다. 또 장시성에서 출발해 산시에 도착할 때까지 중국 전체 27개 성의 절반에 가까운 12개성을 거쳐 62개 도시를 점령했다. 마오가 장정이 중국 전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그씨를 뿌린 파종기라고 이야기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홍군은 장정기간 중 18일간의 야간 행군, 235일간의 주간 행군을 함으로써 총 253일간 행군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115일은 전투를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중 56일은 홍군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놓고 마오가 이끄는 중앙군(제1방면군)과 장궈타오(張國燾)가 이끄는 제4방면군이 격론을 벌여 발이 묶인 채 쓰촨 북서부 지방에서 원치 않은 휴식을 해야 했었다. 이를 빼고 나면 사실상 행군을 하지 않은 '휴식일'은 59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 중에서 15일은 하루 종일 전투를 했다. 결국 하루 평균 40km를 걸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밖에 하루 종일 전투를 한 15일 이외에도 매일 평균 1건의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 같은 초인적 강행군으로 결국 출발 당시 8만5,000명에 달하던 홍군은 도착 때에는 8,000명(4,000명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줄었다. 특히 원래 출발했던 사람은 3,000명에 불과했다. 서른 명에 한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번 특집은 한국인으로는, 아니 비중국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직접 장정을 돌아보고 쓴 장정 기행기이다. 물론 홍군처럼 1년을 들여 걷지는 못했고 대신 차를 타고 돌았다. 구체적으로, 6개월간의 중국 현지 어학연수 및 자료조사를 포함해 1년 반 동안 준비를 했고 2008년 3월 10일부터 4월 28일까지 49일간 자동차로 하루 평균 11시간씩 1만3,500km를, 항공기 이동거리를 포함할 경우 1만8,000km를 장정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직접 보고, 취재한 기록이다. 특히 거리로 보자면 1만3,500㎞의 60% 이상인 8,000㎞를, 시간으로 보자면 총 500여 시간의 70% 이상인 350여 시간을 한국인들이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오지 등의 비포장도로를 헤치고 가야 했다. 그 과정은 파란만장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다.

워낙 오지라 길이 나쁜데다가 올림픽 등으로 길을 수리한다고 다 뜯어 놓아 길이 길이 아니었다. 가는 길이 도중에 차가 다니지를 못하는 길이라 다시 돌아가 동서남북으로 시도를 했다가 '4수'만에 성공한 적도 있다. 30km를 6시간 반 만에야 통과할 수 있었던 공포의 비포장도로도 있었다. 자오핑두(皎平渡)라는 곳을 가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먼지가 20cm씩 쌓인 험난한 산길을 오토바이?타고 넘어야 했다.

게다가 갑자기 터진 티베트사태로 두 차례나 추방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쓰촨 서북의 장족(티베트족) 지역인 루딩(定)교 취재 중 위험지역이라는 이유로 공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추방을 당했다. 며칠 뒤 다른 장족 지역을 가기 위해 4,532m의 고지를 넘어 10시간 만에 도착한 도시 입구에서 저지당해 다시 빙판길의 그 고지를 넘어 돌아와야 했다.

그 결과 일정도 계획보다 보름정도 줄이고 쓰촨 서북부의 930km 구간을 건너뛰어야 했다. 원래 장정이 1만km였으니 약 10분의 1구간을 다녀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

나 그 바람에 목숨을 구했는지 모른다. 출입저지를 당한 지역이 바로 최근 쓰촨 지진이 일어난 지역으로 출입저지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취재를 하다가 지진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장정은 1)국민당군과의 투쟁이자 2)자연과의 투쟁이었으며 3)내부노선 투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21세기 장정'은 좀 다른 투쟁이었다. 1) 길과의 투쟁, 2)길 때문에 못 간다는 운전기사와의 투쟁, 3) 나쁜 길로 인한 시간과의 투쟁, 4) 출입금지 등 규제와의 투쟁, 5)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인내력)과의 투쟁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 장정에 통역 겸 총간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 오만용씨, 조선족 보디가드였던 김문석군, 그리고 험한 길과 살인적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 차를 몰아준 세명의 운전기사 등에게 감사 드린다. 재정적 지원을 해준 현대자동차와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주한 중국대사관에도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가장 빚지고 있는 것은 현지에서 만난 수많은 민초들이었다. 열악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 준 맑은 미소가 어려웠던 장정을 참고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실 70년 전 장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도 바로 이들 민초들이었을 것이다. 쓰촨 장족지역에서 하룻밤을 같이한 한 장족과 한족 부부는 민족화해가 무엇인가를 생활로 보여주었다. 티베트문제의 지혜로운 평화적 해결과 쓰촨 지진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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