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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로버트 메이플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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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로버트 메이플소프

입력
2008.06.0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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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의 에술' 섹슈얼리티 탐구의 흑백 사진들

짧고 화끈한 인생을 산 예술가는 많고 많지만,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1946-1989)처럼 그 기승전결의 이미지를 제 자신의 사진으로 잘 담아낸 작가는 많지 않다.

1960년대 후반 새로운 대안적인 사회운동이 한창 제 몸을 형성하던 시기, 미남 청년 메이플소프는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자, 흑인민권운동에 뒤이어 동성애자권리운동이 대두됐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69년의 스톤월 폭동. 경찰의 동성애자 차별적 정책에 분노한 동성애자들이 일으킨 일주일간의 폭력 사태는, 이후 게이하위문화에 자신감을 부여했다. 이런 해방운동의 흐름에 용기백배한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이플소프.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작가는 1,500점 이상의 폴라로이드 작품을 제작했는데, 대개 익명의 나체를 찍은 것이다. 그의 잘 알려진 후기작들에 비하면 이 작품들은 대단히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다.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혹은 게이 클럽이나 파티 등을 통해 만난 익명의 상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20대의 청년은 ‘괴물’로 거듭났다. ‘사진기를 무기 삼으면 피사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음’을 깨우친 것.

메이플소프의 주요 작업에서 느껴지는 사도마조히즘적인 성격은 그러한 초기의 긴 실험 과정을 통해 계발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 시작되는 정물과 꽃 사진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가에게 사진 촬영 세션은 대상을 홀리는 무기였을 테고, 대상을 촬영하는 일 자체는 자신을 홀리는 과정이었을 테다.

1970년대 중반, 메이플소프는 중간 크기의 핫셀블라드 카메라를 구입해 보다 안정된 형식으로 초상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피사체로 초대된 대상은 뉴욕의 화가, 작곡가, 명사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 작가는 보다 강한 자아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점차 높여갔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름다운 흑백 프린트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를 ‘섹슈얼리티 탐구의 기록지’라 불러도 좋겠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두고 종종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답은 간단하다. ‘외설의 예술’이다.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사진 수집가 샘 웩스타프(Sam Wagstaff, 1921-1987)조차 작가를 “나의 작고 음흉한 포르노그래퍼”라 불렀다.

웩스타프는 1987년, 메이플소프는 1989년 영면했다. 사인은 공히 에이즈 합병증. 1988년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모든 것이 급변했던 1970-80년대에 (사진은) 완벽한 매체였거나,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뭘 하나 만드는 데 2주일씩 걸렸다면, 난 열정을 잃었겠죠.” 그렇게 그는 빨리 살고 빨리 죽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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