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민심은 무서웠다. 정부가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의 관보 게재를 전격 유보한 것은 수입재개를 강행하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2일 오전까지만 해도 관보 게재를 강행할 태세였다. 한미 간 공식 협상을 통해 사인까지 마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협상을 깬다면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고민은 많지만 관보 게재를 철회할 계획이 전혀 없다”면서 “수입재개를 더 늦춘다고 상황이 바뀔 게 뭐가 있느냐”고 정면돌파 의지를 밝혔었다. 이 관계자는 “관보 게재를 유보해 봤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야당이나 시민단체 측에서는 결국 재협상을 하자고 할 텐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청와대의 강경 분위기는 오후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이 의원총회에서 쇠고기 문제와 관련, 관보 게재를 늦추고 미국과의 재협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자 청와대도 관련 수석비서관들이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숙의했다. 결국 이 같은 한나라당의 강경 입장이 청와대 최고위층으로 전달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예정대로 고시를 관보에 싣기 위해 책자 제본이 한창이던 행정안전부가 작업을 중지하고 정부 결정을 기다린 것도 이때였다. 이후 청와대와 농림수산식품부, 행안부 간 의견교환이 긴박하게 이뤄지면서 관보 게재 유보가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관보 게재는 유보됐지만 이날 밤에도 촛불시위가 계속될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이번 결정은 임시 조치에 불과하기에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으라는 주문이다.
아직 이번 조치가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정부 내부에서도 재협상 여부에 대해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정부가 외교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미국과의 추가협상을 추진한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추가 협상이 진행될 경우 관건은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제한’과 ‘내장 등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 등 월령 부위 제한’ 등의 조항이 삽입될 수 있느냐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측 입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미국 측은 그간 국내에 번지는 쇠고기 협상 결과에 대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해 왔다.
만일 미국 측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밖으로는 미국의 외면 속에 안으로는 국민의 압박이 계속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유보 조치가 ‘시간벌기용’이란 시각도 있다. 일단 관보 게재를 유보한 뒤 이명박 대통령이 강도 높은 국정쇄신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지지세력인 보수층을 결집, 성난 민심을 조금씩 달래 보자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이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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