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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5> 미리내-그리움, 또는 부재(不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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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5> 미리내-그리움, 또는 부재(不在)의 사랑

입력
2008.06.0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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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대 뒤쪽이었던 1970년대 한복판, 서울 광화문 뒷골목에 미리내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시민회관이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기 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광화문통이 하도 변해서 그 집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짚어내기 어렵다.

같은 골목에 선다래, 당주당, 풍미당 같은 옥호를 지닌 분식집도 있었는데, 메뉴나 음식 맛이 엇비슷했다. 냉면, 떡볶이, 마탕, 아이스크림 따위를 팔았다. 내가 친구들과 주로 드나든 곳은 신문로 쪽에서 가까웠던 미리내였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여학생 고객이 가장 많은 곳이 미리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분식집의 주된 고객은 중고등학생들이다. 학생들 머리맵시가 조금은 자유로워진 지금과 달리, 그 시절 분식집엔 단발머리나 갈래머리, 그리고 까까머리뿐이었다. 그 ‘착실한’ 머리의 어린 선남선녀들이 데이트를 한답시고 미리내에서 만나 풋사랑을 키웠다.

미리내의 자극적인 비빔냉면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어찌나 매웠던지,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꼭 마탕이나 아이스크림으로 혀를 달래야 했다. 여린 혀를 호리던 그 맵고 단 맛은 내 풋사랑의 맛이기도 했다. 미리내에서 내 풋사랑이 움텄다. 그 풋사랑에 떠밀려, 난생 처음, 잘 알지도 못 하는 여학생을 위해 호기롭게 주머니를 탈탈 턴 적도 있다.

미리내의 비빔냉면만큼 입에 맞는 냉면을 그 뒤 맛보지 못했다. 더 자라서 드나든 냉면 전문집들의 버젓한 함흥냉면도 미리내 냉면만큼 쾌락을 주진 못했다. 더 자라서 연애를 하면서도, 미리내의 풋사랑만큼 아릿한 쾌락을 맛보진 못했다. 미리내의 비빔냉면과 함께 내 어수룩한 사랑의 시절도 멀어졌다.

10대 후반 분식집 '미리내'의 풋사랑 새록새록

지금 이 글을 한글 2005로 쓰고 있는데, 미리내라는 말에 어김없이 붉은 밑줄이 그어진다. 이 한글프로그램이 ‘미리내’를 표준한국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국어사전을 들춰봤더니, 뜻밖에도 이 말이 표제어로 올라 있다. 풀이는 이렇다.

“은하(銀河) 또는 은하수(銀河水)의 딴 이름.” 이 사전의 너그러운 편찬자는 미리내를 현대 표준한국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미리내를 방언이나 틀린 말이라 판단했다면, 표제어로 올리지 않았거나 표제어 뒤에 반(半)화살표를 하고 ‘은하(수)’라고 적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미리내라는 말이 ‘은하수’의 뜻으로 쓰이는 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내게 미리내는 내 첫 사랑이 움튼 분식집의 옥호였을 뿐이고, 지금도 그렇다.

요즘보다 고유어를 훨씬 많이 쓰던 과거엔 은하수를 미리내라 불렀던 시절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글이 만들어진 15세기 이후의 옛 문헌에도 미리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적잖은 언중(言衆)이 미리내라는 말을 실제로 썼다 하더라도, 그것은 방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남해안 일부 지역과 제주에서는 이 말을 지금도 쓰고 있다 한다.

미리내의 어원은 잘 알려져 있다. 중세어로 ‘미르’(또는 ‘미리’)는 용(龍)을 뜻했고, ‘내ㅎ‘는 내(川)를 뜻했다. 그러니까 미리내는 용이 사는 시내, 용천(龍川)이라는 뜻이다. 옛 한국인들은 밤하늘의 무수한 미광성(微光星)에서 시내를 떠올렸고, 지상의 물을 박차고 승천한 용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낭만적이랄 수도 있겠으나, 미리내라는 말의 단아한 정감을 그 어원적 의미가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차라리 은하나 은하수라는 말이 더 아치 있다. 은빛으로 흐르는 강.

유럽사람들에게 미리내는 ‘젖길’이다. 영어 ‘밀키 웨이’(Milky Way)가 그렇고, 프랑스어 ‘부아 락테’(Voie lactee)가 그렇고, 독일어 ‘밀히슈트라세’(Milchstrasse)가 그렇다.

이탈리아어 ‘비아 랏테아’(Via lattea)나 스페인어의 ‘비아 락테아’(Via lactea) 역시 마찬가지다. 스페인사람들은 더러 미리내를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란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향하는 중세 이래의 유명한 순롓길을 가리키는데, 밤하늘의 미리내가 땅위의 ‘산티아고 가는 길’과 나란한 듯 보인다 해 미리내의 은유가 되었다.

‘밀키 웨이’ 계열의 말에 견줘 다소 문어 태가 나는 ‘갤럭시’ 계열의 말들(영어 galaxy, 프랑스어 galaxie, 이탈리아어 galassia 등) 역시 어원적으로 ‘젖’을 뜻하는 그리스어 ‘갈라, 갈락토스’(gala, galaktos)와 이어져 있다.

고대 유럽인들 눈에 미리내는 흐르는 젖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말들은, 희부연 빛깔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은하’와 통하는 데가 있다.

'용이 사는 시내' 어원… 유럽인들에게는 '젖길'

미리내에 얽힌 사랑이야기로 얼른 떠오르는 것은 동아시아의 견우 직녀 설화다. 옥황상제는 손녀 직녀(織女)를 목동 견우(牽牛)에게 출가시켰다. 둘은 금실이 어찌나 좋았던지, 온종일 붙어 희롱하느라 베짜기와 소치기라는 제 할 일들을 잊었다.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그 둘을 미리내 양쪽에 떼어놓고 한 해 한 번, 7월7석 날에만 만날 수 있게 했다. 칠석날, 드넓은 미리내를 건널 길 없어 그들이 안타까워하자, 까마귀와 까치들이 머리를 맞대어 다리(오작교)를 놓아주었다는 얘기.

옛 사람들은 이날 오는 비, 곧 칠석우(七夕雨)를 직녀와 견우가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 미리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견우성(독수리자리의 알파별 알타이르)과 직녀성(거문고자리의 알파별 베가)이 실제로 7월7석 무렵엔 서로 가까워 보인다 한다.

서정주는 이 설화를 소재로 <견우의 노래> 라는 시를 썼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었다, 낮었다 출렁이는 물ᄉ살과/ 물ㅅ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하(銀河)ᄉ물이 있어야 하네.// 도라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섭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七月) 칠석(七夕)이 도라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ᄒ세.”

가장 간절한 사랑은 연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솟아남을 이 시는 내비친다. 그리고 연인들 사이의 장애물이 험할수록,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그 사랑이 더욱 굳건해진다고 노래한다.

그런 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 속담 하나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말한다. 우리 경험은 양쪽 다 옳다고 가르치는 것 같다.

어떤 사랑은 시공간적 거리에 허물어지고, 어떤 사랑은 그 거리를 연료로 더욱 세차게 불타오른다. “촛불은 바람에 꺼지고 큰불은 바람에 활활 일듯, 이별은 작은 열정을 지워버리고 큰 열정을 더욱 키워준다”고 라로슈푸코는 말했다.

견우직녀 설화 소재로 한 서정주의 詩 '견우의 노래'

이별이 열정을 키우는 것은 부분적으로 기억의 미화작용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먼 곳의 연인은, 이미 죽은 연인은 한없이 고귀하게 치장된다. 그 때 부재(不在)의 사랑, 곧 그리움은 최고의 사랑이 된다.

우리가 미리내라 부르는 것은 태양계가 포함된 우리은하(은하계: The Galaxy)를 가리킨다. 우주에는 우리은하말고도 수많은 외부은하(galaxies)가 있다. 우리은하만 해도 그 지름이 10만 광년에 가깝다.

이웃 은하 가운데 가장 가까운 두 개의 마젤란은하도 16~20만 광년 거리에 있고, SF에 자주 등장하는 안드로메다은하는 무려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기억의 미화작용… 힘들고 슬픈사랑 더 간절

우리은하의 크기도 그렇고 이웃 은하와의 거리도 그렇고, 인간의 경험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수치들이다.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리고 개체 생물의 수명이 수만 년, 수십만 년에 이를 수는 없을 터이므로, 아무리 먼 미래에도 은하계의 이 쪽 생물과 저 쪽 생물이 직녀와 견우처럼 사랑을 나눌 수는 없을 테다.

그러나 물리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훨훨 날 수 있는 것이 상상이다. 별과 별 사이를 오가며 이뤄지는 <스타워즈> 식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인류의 지식은 아직 보잘 것 없다.

어떤 세계에선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고, 수십만 년을 사는 개체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선 미리내 위에 ‘사랑의 유람선’이 떠다닐지 모른다. 사랑을 실은 은하특급 999호가 쌩쌩 달릴지 모른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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