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쇼 브라더스> 가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본과의 합작을 계획했다. 첫 작품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ㆍ소설가ㆍ현 동경도지사)의 대표작 <태양의 계절> 이었다. 태양의> 쇼>
일본에선 1956년 영화로 만들어져 대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당시 홍콩영화의 90% 이상이 무협물이었다. 멜로 배우들은 가수 등을 겸업하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쇼 브라더스> 의 일본 진출이 그들에겐 하늘이 준 기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몬 쵸 사장은 일찌감치 주인공 ‘다쓰야’ 역에 나를 낙점하고 촬영지인 일본으로 보냈다. 쇼>
나는 의기양양하게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그러나 제2 기착지 일본에서 뜻밖에 내 인생의 가장 큰 파도를 만나게 된다. 나는 와세다 대학교의 일본어연구소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의 외국 학생들과의 생활은 세계 각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쇼킹한 현장을 목격한다. 신주쿠 한 나이트클럽에서였다. 홀 중앙에서 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미친 듯이 웃어대며 이 남자 저 남자에 안겨 외치고 있었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웨이터들이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간 외국인 일행이 주위에 묻자 한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조센징인데, 미쳤어요.”
조센징? 그 때 웨이터에게 끌려가던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밖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들과 그녀는 미친 야수처럼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얼굴은 눈물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들 사이에 뛰어들며 그녀를 껴안고 외쳤다. “내가 도와줄게요.” 그녀는 잠시 나를 올려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후, 나는 그녀를 도쿄(東京)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그녀는 차분히 자기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도쿄대 의대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귄 남자친구와 약혼을 하였는데 남자 집에서 그녀가 귀화한 조선인인 것을 알고 파혼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약혼자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약혼자의 아이가 유산되자 그로 인한 쇼크로 술에 취하면 남자들이 약혼자로 보여 자기도 모르게 사고를 낸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재일한국인의 애환, 학대에 가까운 차별, 피눈물 나는 삶 등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와 헤어진 얼마 후, 내게도 어마어마한 뇌관이 날아왔다. 홍콩에서 한국담당 황이사가 달려왔다. 일본 합작회사에서 내 국적을 놓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영화 주인공이 한국인(조센징)이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으니 국적을 홍콩이나 일본으로 바꾸라는 요구였다.
당시 일본에선 최고의 투수 가네모토, 최고의 가수 미소라 히바리 등, 숱한 ‘조센징’ 출신 연예인, 스포츠인,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구선수 장훈 이외에는 모두 자신들의 출신을 숨기고 있었다. ‘조센징’으로 성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기였다.
회사는 매우 다급하게 나의 결심을 요구했다. 일본 합작회사는 굴지의 동보영화사였다. 그들은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 뒤 연봉 3,000만엔(3억원)으로 5년간 계약하자고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홍콩 쇼브라더스와 이미 트레이드 협상을 마친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왔다. 돈과 출세를 택할 것이냐. 내 나라를 택할 것이냐. 막다른 길에 서게 된 나는 매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회사에서는 내 결정이 있기 전까지 모든 것을 중단시켰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었다.
홍콩과 일본의 최고의 환경과 대우에 길들여져 있던 나로서는 지금 눈앞에 던져진 부와 명예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한 배우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돈과 노력을 쏟아붓는 이 환경이 너무나 행복하고 좋았다. 어둡고 가난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다시 고생할 용기가 솔직히 나지 않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미국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길종 형의 속달 전보였다. 마지막으로 형의 조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편지를 뜯었다. 형의 글은 단 한 줄이었다. <나라를 버리면 너는 물론 죽고 나도 죽는다.> 잠시 정신이 아뜩해졌다. 나라를>
그때였다. 편지를 들고 서 있던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방안에 있던 물건들이 우루루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피커에선 실내에 있는 사람은 빨리 밖으로 나오라는 다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진이었다. 나는 거리로 달려 나갔다. 거리는 차량과 사람들이 어지럽게 대피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소란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후 거리가 정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빠져나왔던 건물을 올려보았다. 돈과 명예로 갇혀 있던 방. 허례허식에 흔들리던 내 마음. 그렇다, 이건 내 인생의 지진이었다.
나는 형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암울한 내 나라가 보였다. 그래, 돌아가자. 아무리 가난하고 헐벗고 어두운 내 나라지만 버릴 수 없다. 그 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배고파하고 함께 슬퍼하겠다.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최고의 나라를 만들어 세계로 다시 나오자.
나는 짐을 쌌다. 황이사가 달려왔다. 황이사는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회유하려 했다. ‘<태양의 계절> 은 보통 작품이 아니다. 이시하라 유지로도 이걸로 떴다. 톱스타가 되는 지름길이다.’ 태양의>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동안 당신들이 내게 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이 중국의 中자를 붙여 만든 예명은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태극기를 앞세우고, 다시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1969년 10월 1일, 어둡고 차가운 밤, 나는 황이사의 배웅을 받으며 홀로 나리타 공항의 빈 활주로를 걸어갔다. 그리고 트랩에 올랐다. 1973년 7월, 싱가포르에서 아시아 영화제가 열렸다. 심사위원 전원이 일본인 여교수로 구성된 영화제에서 나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08년 5월 30일, 오사카 공항엔 공항사상 최대인 5,000여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비행기 트랩문이 열리며 한국의 스타 배용준이 모습을 나타냈다. 인생은 계속된다. 나의 꿈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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