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말 서울 마포구 염리동 A아파트. 이 아파트에 사는 서모(10)군이 13층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2004년말 부모가 교통사고로 숨진 뒤부터 서군은 이모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행실이 바르지 못해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서군은 이날도 ‘지갑을 뒤져 돈을 훔쳤다’는 이모부 꾸지람을 듣고 목숨을 끊었다.
#2. ‘놀토’였던 지난달 24일 오전 9시, 서울 도봉구의 한 대형 할인점. 김모(38ㆍ여)씨가 아들 박모(8ㆍ초2)군에게 1,000원짜리 지폐 석장을 쥐어주며 “퇴근할 때까지 할인점에서 놀라”고 당부했다. 엄마와 헤어져 할인점에 들어간 박군은 무려 9시간 동안 전자제품 코너에서 오락도 하고, 시식 코너에서 배를 채우다가 오후 6시 퇴근한 엄마와 함께 귀가했다.
부모의 따뜻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혼자 커가는 어린이가 결손가정과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결손 가정이나 맞벌이 가정 등 부모가 바빠서 혼자 빈집을 지키는 이른바 ‘열쇠아동’은 2006년말 현재 약 300만명으로 집계됐다. 14세 미만 전체 아동(899만명)의 3분의1에 달하는 수치다.
보사연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이혼율이 증가하고 아내도 돈벌이에 나서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방치된 아동의 숫자도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5% 수준에 머물렀으나, 중년 주부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면서 지난해에는 62.6%로 늘어났다.
방치된 아동이 늘어나면서 놀이터에서 순진 무구했던 어린이의 생활상도 많이 바뀌고 있다. 박군처럼 부모가 없는 사이 할인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른바 ‘마트 키드(Mart Kid)’가 등장하는가 하면, 서군처럼 부모 없는 설움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이전만 해도 10대 자살률은 10만명당 3명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2006년에는 8명을 넘어섰다. 6년 사이에 10대 자살률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저소득층 아동이 방치되면서 ‘부의 대물림’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업 주부 엄마를 둔 어린이와 그렇지 않은 어린이의 생활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엄마가 돌봐주는 어린이의 독서비율(17.3%)은 방치된 어린이(9.5%)의 두 배에 달한 반면, 컴퓨터 게임을 하는 비율(28.3%)은 그렇지 않은 어린이(35.4%)보다 낮았다.
성북구 나눔의 집 관계자도 “방과 후 학원에 갈 형편이 되지 않는 빈곤층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라면을 끓여먹으며 밤 늦게까지 논다”며 “당연히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학업성취도도 낮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에서는 방치된 아이들이 문제인 반면, 엄마가 돌봐주고 물질적으로 풍요한 중산층 가정에서는 외동이 자녀의 ‘독불장군’ 성격이 문제다. 강남의 한 유치원 교사는 “대부분 원아들이 독자 혹은 무남독녀”라며 “형제 없이 자라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성격의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중산층 이상의 ‘나홀로 아동’은 마케팅 및 금융업체의 핵심 타깃으로 떠오르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중산층 이상 계층의 외동이 자녀는 올해 업체가 공략해야 할 7가지 핵심 집단(블루슈머)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며 “이들을 겨냥해 어린이 전용펀드와 감성 놀이학교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나홀로 아동' 방치하면
부모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아동들이 무려 300만명에 달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이 때문에 '마트키드'나 '열쇠아동' 등으로 불리는 아동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나홀로 아동'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심민섭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정신과 교수는 "특히 초등학교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로 매우 중요하다"며 "부모와의 관계에서 좌절이나 불안, 분노 등을 느낀 아이들은 결국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는 낮은 학업 성취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심 교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 아이들과 대화하는 일은 부모 입장에서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생계 문제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부득이하게 적다면,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하루의 일과를 묻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부모의 관심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혼자 크는 아이가 성격 장애를 겪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방과 후 늘 혼자인 학생들은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성격이 많으며, 나약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할 개연성도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또 "생활이 안정된 가정의 경우 여러 학원에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금물"이라고 강조했다. 캠프 등 단체생활을 할 수 있는 곳에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하고 친척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공공복지시설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김미숙 보사연 아동복지팀장은 "단 한 명의 아동이라도 방치되지 않도록 사회적인 안전장치 마련이 절실하다"며 "아이들에게 식사와 뛰어 놀 공간을 제공하는 아동복지센터를 지역별로 최소한 1개 정도는 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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