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면 양쪽 벽 끝으로 한복을 차려입은 두 여인의 흑백 초상이 걸려있다. 초상 속의 치맛자락은 캔버스 밑부분에서 광목천의 실제 치맛자락으로 변해 화면 위로 흘러 넘치고, 작품의 좌우로 설치된 전면 거울은 강줄기처럼 흘러 넘치는 여인의 초상을 무한히 반복하며 서로 비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면, 무한을 향해 뻗어나가는 흰 광목차림의 여인과 나의 모습이 아찔할 만큼 아득하다. 우주에 홀로 선 것처럼 고독하다.
사진으로 기록된 근ㆍ현대사를 극사실적 화풍의 회화로 변환해온 조덕현(51) 이화여대 교수의 개인전 ‘리-콜렉션(Re-collection)’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의 모티프가 된 두 여인은 한국의 전설적 패션 디자이너 노라 노(80) 여사와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 회장의 부인 로더미어 자작 부인(58). 전시 제목처럼 두 여인의 삶을 ‘재수집’, 혹은 ‘회상, 회고, 추억’한, 컬렉션 형태의 프로젝트다. 콩테와 연필로 그린 사진처럼 정교하고 섬세한 회화작품을 비롯해 설치, 사진, 영상 작품 등이 선보인다.
어느 저택의 거실처럼 꾸며진 1층 전시장은 노라 노의 앨범에서 추려낸 사진들을 그림으로 바꿔 그린 ‘노라 컬렉션’. 경성방송국 창립자의 딸로 태어난 노명자는 일제 말기 위안부 징집을 피해 얼굴도 모르는 어느 장교와 사진 결혼식을 올렸다가 3년 만에 이혼, 입센의 여주인공과 같은 이름 노라로 바꾸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여성을 옭매고 있던 인습과 질곡을 박차고 홀로 선 노라 노는 한복이 의상의 전부이던 시절 뉴욕 5번가의 패션을 한국에 상륙시키며 패션을 통해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다양한 초상화와 문희 등 그의 의상을 입었던 옛 스타들의 웃고 있는 흑백의 얼굴들이 고풍스런 액자 속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2층에는 일본에서 태어나 도미(渡美), 손 모델을 하다가 영국 귀족 로더미어 자작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정순이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내가 있었던 로더미어 자작의 정부로 20여년을 살다가 1993년 그의 아내가 사망한 후 결혼식을 올린 로더미어 자작부인은 사랑의 집념으로 한국여성으로는 드물게 영국 귀족이 된 인물.
전시장엔 검은 우물 같은 사각의 상자 안에 흰 연꽃이 놓여있는 설치 작품 등, 로더미어 자작부인이 어머니, 남편과 함께 묻힐 곳인 무주 백련사와 관련된 회귀와 회상의 기표들이 가득하다.
회화를 통해 두 여인의 삶을 서사적으로 풀어낸 이번 전시는 역사의 객관성과 개인적 삶의 구체성이 빚어내는 특별한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참고로 작가와 두 여인은 전시 이전에 아무런 연분도 없었다. 7월5일까지. (02)733-8449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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