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먹는 행위는 죽음이 매개할 때만 가능하다. 다른 약한 동물을 잡아 먹을 때는 물론이고, 채소를 뜯어 먹거나 나뭇가지에서 새 순만 따서 먹더라도 먹히는 존재에게는 죽음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다른 존재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비로소 삶을 이어가는 먹이사슬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똑같이 죽음을 먹더라도 인간, 특히 거듭되는 농업혁명을 거친 후의 인간은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자연의 주문을 뛰어넘어 그저 삶의 즐거움을 늘리기 위해 필요 이상의 죽음을 낳아 왔다.
■인간과 진화의 역사를 같이 해 온 다른 동물들은 지금도 자연상태에서 굶주림과 포식, 죽음과 탄생을 반복한다. 이에 비하자면 적어도 먹이와의 관련에서 인간의 진화는 완성된 셈이다. 그런데도 먹이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줄지 않는다. 굶주림이나 배고픔의 경험이 기억에 각인한 불안, 또는 유전자에 각인된 굶주림의 고통 때문일까.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세븐> 의 첫 희생자는 음식물 범벅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는 뚱보 남자다. 성서가 일곱 대죄의 하나로 꼽은 ‘탐식(貪食)’의 상징이다. 식욕이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븐>
■어릴 때 아주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니가 닭을 잡았다. 마당에 놓아 기르던 닭이어서, 모이를 주거나 닭장 문단속을 하며 식구들과 정이 들었다. 그런 놈을 잡아 목을 비틀며 어머니는 <지장경> 을 읊었다. ‘정말 미안하다. 부디 극락환생하길 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죽어간 닭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잠시, 모처럼 입에 댄 닭고기 맛은 기막혔다. 지장경>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드문 육식 경험이 한국인의 고기 맛을 특별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대다수 한국인들이 쉽게 고기를 즐길 수 있게 된 지 겨우 30년 만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축산방식의 변화다. 이제 가축은 동물농장에서 자라지 않고, 동물공장에서 제품처럼 ‘찍어진다’. 닭과 돼지, 소 모두가 최대한 부드러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생물학적 최악 환경에서 급속 성장이 강제된다. <죽음의 밥상> 등이 전하고, ‘광우병 파동’을 거치며 국내에도 널리 소개된 미국의 축우 실상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죽음의>
광우병의 원인인 ‘동물성 사료’도 결국 급속 생산의 도구였을 뿐이다. 육식 욕구를 제약하지 못하면, 언제든 제2, 제3의 광우병과 맞닥뜨리리란 예감이 불길하다. 촛불시위로도 씻어낼 수 없는 불안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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