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의 거취가 불투명할 때 만큼 힘든 시기는 없다. 특히 최고경영자(CEO)의 경우에는 조직의 구조가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뇌부의 불안한 입지는 조직 운영 차질은 물론, 장ㆍ단기 사업계획까지 사실상 ‘올스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로부터 재신임을 얻은 윤용로 기업은행장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 취임한 지 6개월 남짓 밖에 안됐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임에 성공한 CEO와 기분은 크게 다를 바 없다. 덕분에 윤 행장의 꿈과 의욕은 6개월 만에 두 배로 커졌다.
그는 요즘 지방 출장에 열심이다. 이름하여 ‘타운미팅’. 전국의 중소기업 사장들과 직원들을 만나 실상을 파악하는 현장 경영의 일환이다. 재신임 파동을 겪은 3~4월에도 예정된 네차례의 방문(경기 광주, 의정부, 아산, 전주)을 멈추지 않았지만 이 달 초 재신임 결정이 난 후 방문에는 더욱 탄력이 붙는다.
27일 경기 파주시 공단. 윤 행장은 식순에 맞춰 원고를 읽고 지점 직원들과 식사를 한 후 자리를 뜨는 동안 행장 방문 형식을 벗어 던졌다. 원고도 없었다. 직원들이 ‘날방송’이라 부르며 당황할 정도로 즉석에서 떠오르는 당부를 하고 고충을 물었다.
아산 방문 때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요즘 금리가 오르지만 사업이 괜찮아 기꺼이 이자 낼 용의가 있다. 다만, 앞으로 상황이 갑자기 나빠졌을 때 ‘나몰라라’ 금리를 올리지 말아달라”고 행장에게 주문했다. 예전 같으면 돈을 빌리고 있는 중소업체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윤 행장은 이를 빼곡히 수첩에 받아 적은 뒤 위로의 말과 함께 실질적 대안 마련을 약속했다. 수행한 은행 관계자는 “중소 도시 영세 기업인들에게는 은행장이 직접 자신들을 찾아와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변화된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로 윤 행장은 기업은행의 예금 유치왕이다. 민영화를 앞둔 기업은행의 가장 큰 고민은 민영화 이후에도 중소기업 금융을 보다 안정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자금조달(수신)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다. 예금유치에 애쓰는 건 행장과 일반 직원 모두의 일이지만 윤 행장은 차원이 다르다. 21일 ‘마음 먹고’ LG디스플레이 본사를 찾은 윤 행장은 “기업은행에 예금하면 그 돈은 대부분 중소기업의 자금으로 쓰인다”며 “대기업의 중소기업 상생 협력은 기업은행에 예금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그가 이날 하루 ‘중소기업희망통장’으로 끌어 모은 예금액은 무려 1,200억원. 은행 관계자는 “매달 시상하는 행내 예금왕 기준으로도 가장 큰 금액이라 윤 행장이 시상식에 나서면 대상은 ‘떼놓은 당상’”이라며 “이런저런 모임 때마다 카드ㆍ예금 유치에 열심이지만 대부분 해당 지점장 공으로 돌려서 그렇지 다 따지면 족히 1조원은 넘을 것”이라고 전했다.
요즘 윤 행장의 최대 관심은 모든 낡은 틀을 벗어 던지는 것. 재신임 확정된 지 며칠 뒤 윤 행장은 ‘직원에게 드리는 글’에서 “업무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야근이 많으면 왜 많은지 이유를 찾아 해결책을 마련하고 현장에서 불필요한 업무부담을 줄이려는 자세와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문화를 키우자”고 주문했다.
실제 며칠 뒤 열린 임원회의에서 윤 행장은 한 달에 두번 하던 임원회의를 한번으로 줄일 것을 지시했다. ‘보기 좋게’가 주 목적이던 파워포인트 보고서도 일반 워드문서로 바꿨다. 불필요한 그림과 도표, 칼라인쇄도 줄이고 회의 시간도 ‘짧게’를 강조하고 있다.
기업은행은 최근 윤 행장의 지시로 ‘본부보다 지점 영업맨이 더욱 인정 받는 조직’을 목표로 7월 조직개편을 준비중이다. 다시 뛰는 윤 행장과 기업은행의 앞날이 주목된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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