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저녁이면 곳곳에서 함성이요, 불꽃이다. 어디서? 광화문?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주목하는 곳은 ‘쇠고기 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의 그 뜨거운 촛불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야구장과 축구장이다.
올 시즌 들어 프로야구는 185경기에 총 203만 여명이 찾아들었고, 28경기가 매진을 기록했다. 이 속도가 계속될 경우 올해 프로야구는 무려 550만 여명을 끌어들이게 된다. 프로축구 역시 관중 수가 늘어 103경기에 134만 여 명이 입장했다. 이 역시 지난해 수치를 뛰어 넘는 것으로 역대 최초로 300만 명 돌파가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다소 경직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요즘 같은 시국에 너무 지나친 열정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쇠고기 재협상 논란도 그렇고, 장기불황이 예고되는 경제상황도 그렇고, 한가롭게 스포츠를 보고 있을 때는 아니지 않느냐는 걱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근시안에 불과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프로스포츠 현장의 열정이란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솟구치고 있는 뜨거운 열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츠에 모여드는 인파는 시간이나 돈이 남아 돌아서 그것을 쓰기 위해 한가롭게 몰려다니는 행렬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열정은 이 사회의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스포츠가 섹스, 스크린과 더불어 이른바 ‘3S정책'의 하나로 대중의 비판적 이성을 가로막는 마취제 역할을 한다는 관점이 있다. 1970, 80년대 저개발 국가에서 이런 현상이 없지 않았다.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나 88년 서울올림픽은 부분적으로 그 사회의 억압적 정치문화를 채색해 주는 선전장이 된 적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점은 건강하지도 않고 유효하지도 않다. 어느 한 시기에 스포츠가 국가의 통제장치로 기능할 수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그 사회의 민주화, 특히 가치의 다양성과 문화의 창발성이 두드러진 곳에서는 이런 ‘최면 기능’이 작용하기 어렵다.
스포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정은 2002년 월드컵 때 체험했던 뜨거운 열망의 재현에 가깝다. ‘4강 신화’로 요약되는 6년 전의 합창, 그것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일순간에 집합한 ‘국민’ 대오가 아니라 저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과 열정으로 거리와 광장을 메웠던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표팀의 연전연승에 따른 현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20세기 내내 겪었던 억압적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민적 열정이었다.
오늘의 상황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경제형편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쇠고기 재협상과 관련한 사회갈등은 점점 더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스포츠현장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선수들의 작렬하는 에너지를 통해 진부하고 낡은 삶을 싱싱하게 씻어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이 때로는 강렬한 힘을 숭배하는 집단주의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런 위험성은 없어 보인다.
누구라도 첫 키스의 어색하면서도 황홀했던 추억은 잊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집합적 내면에 있어 그 첫 키스는 ‘2002 광장의 경험’이었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 강렬했던 열정의 회복은 우리가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꿈이 됐다. 지금 프로스포츠의 행렬은 바로 그와 같은 열망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경기장과 광화문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윤수 문화ㆍ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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