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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9> 감격적인 美연방의회 하원의원 선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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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9> 감격적인 美연방의회 하원의원 선서식

입력
2008.05.2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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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미 합중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충성과 신념을 다할 것이며, 어떠한 정신적인 유보나 회피할 생각 없이 자유스럽게 이 의무를 맡으며, 지금부터 귀하가 시작하는 직무를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참으로 감명 깊은 순간이었다. 토마스 폴리 하원의장이 낭독하는 의회법 상의 선서문에 따라 “네”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나는 미 연방 의회 하원의원으로서의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제103차 미 연방 의회가 개회된 1993년 1월 4일의 일이었다. 이 날 나는 치열한 선거전에서 승리한 지 두 달 남짓 만에 하원의원 배지를 달고 처음으로 의사당에 등원했다.

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이민사에 새 장이 펼쳐진 날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코리아를 떠나 빈털터리로 낯설은 이역만리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은 지 꼭 32년. 미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미 합중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관광객이 아닌 의원의 자격으로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 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폴리 하원의장이 주관한 취임선서에서 처음 선서를 한 초선의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110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미 의사당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모두들 탄성을 자아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돔이 있고 그 양 옆에는 하원의사당(남쪽)과 상원의사당(북쪽)이 있다. 돔 밑은 로툰다(Rotunda: 둥근 천장의 홀)가 있다. 천장과 벽은 온통 미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고, 양 쪽에 있는 조그만 로툰다 내부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가득 자리잡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건물이 160여년 전인 1846년에 준공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컴퓨터는 물론 전기, 전화도 없던 그 시대에 말과 밧줄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쪽 길 건너에는 세 개의 하원 건물, 그리고 북쪽에는 세 개의 상원 건물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동쪽에는 미 연방 대법원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두 개의 의회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이 모든 건물들은 지하로 연결돼 있는데 지하 벽은 원자폭탄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워낙 오래된 데다가 통로가 너무도 복잡해 지하에서 헤매는 관광객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도 자그마치 처음 3개월을 지하통로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상원과 하원 건물들은 모두 지하 전기 기동차로 연결돼 있다. 본당에서 투표가 없는 한 관광객들도 이것을 탈 수 있는데 항상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국회의사당 빌딩 안은 항상 관광객으로 붐비는데 아시아계 관광객들은 으레 바삐 걸어가는 나를 붙잡고 함께 사진찍기를 부탁했다.

의회에 첫 등원한 날, 나는 공화당 의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사당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 방청석도 꽉 찼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본회의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의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 옆에 서 있었지만 팔에 안긴 아이들도 있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는 녀석도 있었고, 어떤 애들은 배가 고픈지 칭얼대기도 했고 또 어떤 애들은 2층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게다가 갓난아기들은 시끄럽게 울기까지 해서 회의장 안은 마치 한국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엄숙한 개회식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치 초등학교 입학식에 온 것 같았다.

7년 전에 사업관계 일로 워싱턴에 왔다가 관광 겸 의사당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 때 2층 방청석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본회의장을 내려다 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의원이 돼 아래층 의사당에서 2층 방청석을 올려다보게 되다니 정말 사람의 팔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국산 싸구려 여행가방을 들고 왔다가 로스앤젤레스 공항 바닥에서 가방이 터지면서 짐이 모조리 쏟아졌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님이 정성스레 볶아 챙겨주신 고추장 병이 터지고, 김이 사방으로 날렸는데 이를 하나씩 집느라고 정신을 못차렸다. 그 때의 망신스러웠던 일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면서 나는 미 의회의원으로서 성심껏 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취임선서가 끝나고, 공화당 원내대표의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을 내가 하게 됐다. 취임선서를 한 지 40분 만에 발언권을 얻어 단상 앞으로 나갔다. 개회식 날 초선의원이 제일 먼저 발언을 한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 이후로는 개회식에서 초선의원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나의 발언은 미국의 5개 자치령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에게 연방 의원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의견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 바람에 나는 5명의 자치령 대의원들과 민주당 의원들에게 찍혀 등원 첫 날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제기랄, 공연히 객기를 부려 주책바가지가 된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이용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에라, 어차피 정치가가 되려면 얼굴이 두꺼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정치인을 흔히 영어로 ‘Thick Skin(철면피)’이라고 부른다. 조금도 창피함을 모른다는 뜻이다. 첫 날부터 나는 빠른 속도로 얼굴이 두꺼워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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