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의 태극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國旗)다.’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증할 수 없다.’
일본 수신사인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이 주일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를 근거로 지난 2월 독립기념관이 복원한 일명 ‘박영효 태극기’(본보 2월28일자)를 둘러싼 논란이 식지않고 있다.
독립기념관 주최로 서울 대우재단빌딩 세미나실에서 27일 열린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에서는 최초 국기의 도안자와 제정자는 누구인가, 최초의 국기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 등 초기 태극기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박영효 태극기’ 자료의 발굴자인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본 외무성이 주일영국공사에게 ‘박영효 태극기’의 사본을 보낸 시점은 박영효가 일본에 체제하던 1882년 11월1일” 이라며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선국기는 박영효가 일본체제 중에 제작ㆍ사용됐던 국기 밖에 없었으므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1882년 5월22일 조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깃발인 이른바 ‘이응준 감정본’을 최초의 국기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한 교수는 “국왕의 재가와 정부대신의 논의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는 ‘국기대용’으로 사용된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응준 감정본’은 1899년 미국 해군부 설비국이 간행한 ‘해상국가들의 깃발들’이라는 책에 ‘Corea Ensign’ 이라는 명칭으로 수록돼 있는 태극기로 ‘박영효 태극기’와 ‘리’와 ‘감’의 위치만 다르고 모양이 거의 동일하다. 한 교수도 “이런 점에서 최초의 국기 창안자는 이응준으로, 최초의 국기 제안자는 박영효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국기 제정 주체인 우리 정부측 자료가 아니라 일본측 자료라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교수가 제시한 ‘박영효 태극기’를 최초의 국기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그는 최초의 국기는 1886년 청에서 발간한 ‘통상장정성안휘편’에 수록된 ‘대청국속 고려국기’로 보아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대청국속 고려국기’란 고종이 1883년 3월6일 정식으로 태극기를 국기로 반포한 뒤 같은 달 18일 청에 그려 보낸 태극기로 ‘박영효 태극기’와 괘의 위치는 같으나 바탕이 황색이고 태극의 음과 양 내부에 또 다른 태극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김 교수는 “‘통상장정성안휘편’ 에 이 기를 설명하면서 조선국왕이 자문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공식(official)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 교수가 공개한 박영효 태극기는 ‘해외에서 사용된 최초의 국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관련인물 중심의 제작설은 과거 조선정부무능론이 팽배할 때 ‘선각자 찾기’ 형태로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인 만큼 앞으로는 초기국기의 도안 자체가 가지는 사상적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 교수는 이날 1884년 조선정부의 외교를 담당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공식인쇄해 외국공관에 배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도 공개했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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