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말, 영국 언론들은 총리실 홍보전략책임자인 앨리스테어 캠벨의 사임을 일제히 톱뉴스로 보도했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 홍보수석 정도인 인물의 퇴진이 큰 화제가 된 것은 그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정치적 멘토’여서다. ‘불임(不妊) 야당’이라는 놀림감이 됐던 노동당의 체질을 뿌리부터 개조해 2기 연속 집권시킨 그는 블레어의 ‘정책 설계자’로도 불렸다.
그 과정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험을 과장한 보고서에 깊이 개입됐다는 추문에 휩싸였고, 결국 사임했다. 그동안 그에겐 늘 ‘스핀 닥터(spin doctor)’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 정치홍보 전문가를 일컫는 ‘스핀 닥터’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84년 뉴욕타임스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레이건과 먼데일의 TV토론을 논평한 사설에서 이 표현을 쓰면서부터다. 서로 자기들이 잘했고 잘났다고 과장 홍보하는 두 진영의 모습이 ‘돌리거나 비틀어 왜곡한다’는 뜻의 스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사꾼을 연상시켰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후 정치영역에서 스핀 닥터의 역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줄곧 확대돼왔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론 선점과 정책 홍보, 이미지 관리가 정치게임의 핵심요소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 스핀 닥터를 잘 활용한 사례로는 영국의 캠벨과 함께 미국의 딕 모리스가 꼽힌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그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 등에도 불구하고 재임 시절 내내 5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치상황을 교묘하게 관리해 ‘악명’을 떨쳤다. 이처럼 스핀 닥터는 통치자나 집권세력에겐 필요불가결한 존재이지만, 국민들로선 결코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 특히 정치라고 하면 음모와 계략의 냄새부터 먼저 맡고 악의적 소문과 괴담이 뒤를 잇는 우리 풍토에서는 ‘스핀’이라는 용어만으로도 거부감을 낳기 십상이다.
▦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총무가 엊그제 “영미식의 스핀 닥터제를 도입해 당의 정책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가끔 TV토론이나 정책토론회를 보면 엉뚱한 사람이 나와서 당의 정책과 다른 얘기를 하는 바람에 혼선이 빚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말은 이렇게 했으나, 정부의 거듭된 국정운영 난맥상을 더 이상 못 보겠으니 당이 정책을 주도하고 여론을 추스리겠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고 해도 어원과 어감이 모두 개운찮은 스핀 닥터를 들고 나온 것은 납득하기 힘든다. 그 역할로 유명했던 사람치고 뒤끝이 좋았던 경우가 없었으니.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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