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동안 대학살에서 유태인 10만명 이상을 구출했지만 끝내 나치스의 협력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해당한 루돌프 레초 카스트너에 대한 재조명이 최근 이뤄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06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카스트너는 나치스의 마수에서 어떤 유태인보다 자신의 동족을 많이 살렸으나 생전에는 악마에 영혼을 팔았다는 지탄을 받았고 결국 유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1957년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카스트너의 왜곡된 삶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책들이 연달아 출판되고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제작되면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지 51년 만에 그의 명예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카스트너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44년 5월에서 7월 사이 ‘도살자’ 아돌프 아이히만과 뒷거래를 통해 1,700명의 헝가리 유태인들을 열차편으로 스위스로 대피시켰다.
그는 외팔이에 술주정뱅이이고 가끔 시를 읊조리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아이히만에게 현금 다발과 보석, 트럭 등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처럼 많은 유태인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카스트너의 공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최근 차례로 발간된 두 권의 책과 이 달 하반기에 개봉될 다규멘터리 영화에 따르면 그는 아이히만과 교섭에 성공해 1,700명의 유태인을 스위스로 보낸 뒤에도 탈출하지 않고 나치스 치하에 남았다고 한다.
그는 이후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나치스와 무수한 거래를 하면서 더 많은 생명을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낸 ‘숨은 영웅’이라고 책들과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로이터통신 인터넷판은 25일 카스트너가 전쟁이 끝나기 몇 달 동안 나치스 친위대(SS) 장교와 함께 집단수용소들을 방문해 학살을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고 전했다.
카스트너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최대 10만명의 유태인이 가스실에서 집단 처형을 모면하고 귀중한 생명을 보전하게 됐다.
당시는 독일의 패전 가능성이 짙었고 종전 후 전범재판이 열릴 게 분명했기 때문에 SS대령이던 쿠르트 베허는 열심히 카스트너를 따라 다니며 유태인의 구명에 나섰다. 베허는 유태인 목격자들이 자신의 선행을 증언해 주길 바라 이같이 행동했다.
<카스트너의 열차> 를 저술한 안나 포터는 7년 동안에 걸쳐 미공개 자료의 조사와 함께 수십명을 인터뷰했다. 카스트너의>
그는 “카스트너에 지워진 많은 비난을 뒤로 하고 이젠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할 때”라고 밝혔다.
독일 문학 교수 라디스라우스 뢰브는 <사탄과 거래: 레초 카스트너의 대담한 구출작전> 에서 카스트너의 업적을 재반추하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탄과>
뢰브는 아버지와 함께 ‘카스트너 열차’를 타고 베르겐 벨젠 수용소를 탈출했을 때 11살이었다.
당시 카스트너는 부다페스트 시오니스트 위원회의 말단 직원이었지만 미국과 터키, 스위스의 유태인 구출지원조직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
<닥터 이스라엘 카츠트네르의 박해와 암살> 이란 타이틀을 단 다큐멘터리의 제작사 게일른 로스는 그가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닥터>
전쟁이 끝난 뒤 카스트너는 가족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런데 미국 시나리오 작가 겸 언론인 벤 헤크트가 그를 나치스의 협력자로 매도하고 ‘카스트너 열차’에도 자신의 친척을 태우고 돈까지 받았다는 책이 나오자 그에 대한 반감 여론이 드세졌다.
실제로 카스트너는 기차에 19명의 친척을 탑승시켜 목숨을 구하게 했지만 다른 친척 100명의 경우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한 열차 운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50명의 유태인에게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1,500여명의 유태인을 구하는데 값지게 쓰였다.
52년 카스트너는 유명 선동 언론인 마키엘 그룬발트에 의해 나치스와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룬발트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으나 독선적인 판사는 오히려 카스트너를 규탄하는 판결을 내렸고 바로 그에 대한 여론의 뭇매가 가해졌다.
판결은 1957년 번복됐지만 이미 때가 늦어 카스트너는 자택 앞에서 세 명의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작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비젤은 카스트너에 대해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가 죽음에 처한 이들을 도우려 했으나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안나 포터는 “카스트너가 유태인의 구원자로 보여지길 원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선량하며 오스카 쉰들러도 그를 자신이 아는 이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치하했다”고 두둔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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