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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1> 홍콩서 '천면마녀'는 촬영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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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1> 홍콩서 '천면마녀'는 촬영되고…

입력
2008.05.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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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최초의 한류는 시작부터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내 출연작 <12금전표> 현장사고에 이어 정창화 감독의 <천면마녀> 현장에서도 사고가 발생했다. 주인공 중국 여배우 ‘김배’가 상대역 한국의 ‘성훈’과의 베드신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한국 남자와 러브신을 하고 싶지 않으니 대역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정 감독은 여배우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사 측에 감독과 배우 중 하나를 교체하라고 강하게 맞섰고 가방을 쌌다. 급기야 한국담당 황이사가 중재에 나섰고 여배우 김배가 회사의 압력에 정 감독의 숙소로 찾아가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감독은 싸던 트렁크를 풀었다. 이 과정에서 쇼 브라더스가 한국 측의 손을 들어주자 홍콩 영화계가 불쾌해 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성훈이 한 인터뷰에서, 한국의 태권도와 유도로 새로운 무술을 보여주면 홍콩무술영화계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큰 소리 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무협영화의 대왕이라고 자타가 공언하던 ‘왕위’가 공개적으로 성훈에게 ‘먹거리를 찾아온 똥파리가 제 정신이 아니다’라며 ‘꿍후’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맞받아쳤다. 한국 영화군단은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잔류냐, 철수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성훈은 왕위와 대전하여 그를 쓰러트리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일전불사’를 선언했다. 우리는 즉각 대전 날짜와 장소를 왕위 측에 전달하였다.

성훈은 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태권도 도복을 입고 남국영화학교 무도장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우리 모두 그와 함께 밤을 꼬박 새웠다. 마침내 대전 날이 다가왔다. 대전 장소와 시각은 양 진영에 극비로 전달되었다. 장소는 스튜디오 바닷가 야외세트장, 시각은 자정.

쇼 타운 전체에 긴장이 감돌았다. 정 감독을 제외한 우리 4인(성훈, 임지운, 정감독의 조감독, 나)은 2시간 전 완전 무장을 하고 바닷가로 나갔다. 암흑으로 쌓인 밤바다는 겨울의 찬바람과 하얀 파도로 우리의 가슴을 더 더욱 꽁꽁 얼어 붙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부와 명예의 신천지를 개척하려고 나선 우리의 삶은 정말 녹록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저 차가운 겨울 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홍콩은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 한국의 유명가수들이 홍콩의 밤무대에 수없이 도전하였으나 단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철수하곤 했다. 비밀조직 폭력배에 시달려 생존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였다.

한국군단이 오기 전 6개월의 내 생활을 한국홍콩영사관 측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켰다. ‘남의 밥에 수저를 넣는 일’은 어디서든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나는 중국인들이 가르쳐 주는대로, 하라는대로 따라 하였다. 그것이 옳지 않고 나에게 불이익이 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따랐다. 홍콩에 도착 한 날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였다. 3개월을 그렇게 바보같이 지내자 차츰 그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바르게 하나씩 다시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신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초대가 이어졌다. 중국계 외의 사람들도 나를 초대하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나 또한 그들과 벽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한 순간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경우가 있었다. 한국 영화군단이 오기 전이었다. 신문에 한국의 어린 여가수들이 ‘무랑루즈’클럽에서 공연을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너무 기뻤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보고 싶었다. 홍콩배우들과 스탭들을 초대하여 공연장을 찾았다. 외국에서 한국가수들을 만나니 마치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기뻤다.

문제는 공연 후에 일어났다. 가수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그들을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데 젊은 남자 몇 명이 가수들에게 접근하며 시비를 걸었다. 나는 즉각 그들을 저지하고 그녀들을 호텔로 들여보냈다. 승강이를 끝내고 숙소를 향해 차를 모는데 갑자기 경적을 울리며 자동차 네 대가 내차를 포위하며 달려드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사고!’라는 걸 깨달았다. 재빠르게 숙소 방향의 교외 길로 향하던 차를 시내 쪽으로 돌렸다. <홍콩 갱단> 에 걸려든 것이다. 그들에게 ‘찍히면’ 죽는 길 밖에 없었다. 홍콩인들은 오랜 식민 생활에 맺힌 저항의식 탓인지 타국인들이 홍콩에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행객으로 ‘돈만 뿌리고’ 지나가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하지만 그들의 ‘그릇에 수저를 집어넣는 것’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살해한 후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게 사체를 조각내어 구룡성 안으로 던져 버렸다. 며칠 후 썩은 시체는 다시 성 밖으로 던져졌다. 骸涌“?잡힌다면 그건 곧바로 ‘죽음’이었다.

나는 당시 경찰국 무술사범이었던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차를 몰았다. 잠에서 깨어난 김 사범은 급히 경찰국에 SOS를 쳤다. 갱단의 차들은 호텔 앞에 진을 치고 쉴새 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마치 먹잇감을 보고 포효하는 야수들 같았다. 얼마 후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 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갱들의 차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호텔 창으로 밖을 살피던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암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와 스산한 겨울바람 소리가 귀 끝을 갈랐다. 마침내 멀리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성훈은 걸친 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천천히 다가온 그림자는 뜻밖에 정창화 감독이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다짜고짜 뱉은 정 감독의 한 마디에 우리는 모두 어안이 벙벙해 했다. 알고 보니 쇼 회장이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전날 밤, 쇼 회장은 정 감독이 그 동안 촬영한 부분을 편집실에서 비밀리에 검토했던 것이다. 필름을 통해 정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을 확인한 쇼 회장은 정 감독과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한국배우 및 스탭에겐 특별한 보호대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한국영화군단과 쇼 소속전원의 단합의 밤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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