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매달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둔 시장의 관심은 오로지 ‘기준금리를 이달에는 내릴까’였다. 금리인하로 경기진작에 장단을 맞춰달라는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에, 물가안정을 내세우며 동결로 버텼던 이성태 한은 총재의 고집도 얼마가지 못할 것이라는 게 대다수 관전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시장의 인식에는 ‘인하냐 동결이냐는 선택의 문제’라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인하의 명분이 급속도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상당기간 금리는 내릴 수도 없고 내려서도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분위기 반전의 제1 원인은 유가다. 2월말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국제유가는 3개월도 안돼 130달러선을 넘을 정도로 무섭게 올랐다. 투기수요 등 거품을 얘기하며 조만간 떨어질 것을 점치던 예상도 이제는 상당수 장기상승 가능성으로 옮겨간 분위기.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히 원유가 상승이 고스란히 수입물가→생산자물가→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벌써 4월 수입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31.1%, 생산자물가도 9.7%나 뛰었고 4%대에 들어선 소비자물가 상승률 역시 당분간 계속 오를 공산이 크다.
4월 금통위 직후 이성태 총재는 경기둔화를 언급하며 금리인하를 강력히 시사했었다. 채권시장의 3분의2가 인하를 점쳤던 5월, 금통위는 하지만 또 동결을 택했다. 4%를 넘긴 소비자물가가 결정적이었다. 이 총재는 5월 금통위를 마치고 “물가전망이 연초와는 달라졌다”며 “환율변수가 새로 생겼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이번에는 유가변수가 더해진 셈이다.
이 총재는 26일부터 이틀간 일정으로 개최되는 ‘2008년 한국은행 국제 컨퍼런스’에 앞서 미리 배포한 개회사를 통해 “유가나 곡물가격의 변동 등에 따른 경제적 충격을 미리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 같은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으로 중앙은행의 정책수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 내부의 분위기는 여전히 인하에 부정적이다. “금리는 매달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라는 이 총재의 발언에 비춰서도, 최근 유가 움직임은 (인하를 위한)상황을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인식이 강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금리인상 전망까지 나올 지경이다. 메릴린치는 22일 세계경제 설명회에서 “한국의 인플레 압력이 심해 중앙은행이 내년까지 금리를 1%포인트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인하를 거론할 타이밍이 아니다”는 데 입을 모은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금리를 내리려면 최소한 경기둔화의 위험과 물가상승 위험이 엇비슷해야 하는데 지금은 물가상승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우려 대상은 물가상승의 주요인인 인플레 기대심리다. 현 상황에서 금리인하는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경제주체들의 예상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거시경제실장은 “내수가 위축돼 당장 금리를 내려도 실제 물가상승 압력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기대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인하론은 언제쯤 다시 고개를 들까.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4월 수입물가 상승분의 3분의1은 환율 때문이었다”며 “최소한 환율이 어느정도 하향안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3분기 후반 이후에나 인하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융연구원 신 실장은 “유가 방향이 확실히 꺾여야 인하가 가능하겠지만 국제유가가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시차가 상당해 연말로 갈수록 물가는 더 오르고 경기는 어려워지는 난국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김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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