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대(42)씨는 16년 전 그 날을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미국에 건너가 선진 컴퓨터 설계 기술(CAD)을 익히느라 4년 간 고생하다 고향인 울산광역시 온산읍을 찾았을 때다. 가족을 만날 생각에 부푼 가슴을 안고 눈에 띄는 택시에 무조건 올라탔다. 차가 별로 없는 거리였기 때문일까. 택시는 총알처럼 내달렸다.
힘들었던 공부와 타향살이의 설움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내게도, 고향의 가족에게도 희망찬 미래가 열리리라는 기분 좋은 설렘에 눈이 스르르 감기려는 찰나, ‘쾅’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과속으로 달리던 택시기사가 맞은 편 소형 버스를 발견하고 운전대를 꺾으면서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씨는 온 몸으로 충격을 떠안았다. 아픔을 느끼기 전에 세상이 먼저 깜깜해졌다. 당시 국내에 몇 안 되던 유능한 컴퓨터 설계 기술자의 미래가 한 순간에 날아갔다.
눈을 뜬 것은 석 달 뒤였다. 의사들은 뇌의 절반이 함몰된 그가 살아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는 눈을 떴고,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대신 그에겐 ‘1급 지체장애인’이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오랜 재활 훈련 끝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게 된 김씨는 한동안 세상을 원망하며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다. 그 때 구세주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게 KT의 ‘IT서포터즈’다. 그는 소외계층에게 컴퓨터 및 인터넷 이용법 등을 가르쳐주는 IT서포터즈의 도움으로 컴퓨터 교육을 받은 뒤 서울 구산동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IT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김씨는 요즘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 최고 컴퓨터 전문가에서 장애인으로
김씨는 경남 창원기계공고를 졸업하고 1984년 풍산금속에 기계설계 기술자로 취직했다. 입사 당시 업무는 제도판과 자, 연필을 이용한 금형 설계. 몇 년 뒤 국내에 컴퓨터 설계 기술(CAD)이 도입됐다. 회사는 뛰어난 설계 기술자였던 그를 독일 카드라사에 보내 CAD 위탁 교육을 받게 했다. CAD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89년 풍산금속이 미국 아이오와시티에 공장을 지으면서 다시 선발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CAD 분야의 가장 앞선 프로그램인 ‘오토캐드’를 배웠다. 당시 국내에는 오토캐드 기술자가 전무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앞선 기술이던 오토캐드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며 4년을 근무했다. “오토캐드를 잘 다룬 덕분에 당시 월급이 300만원이 넘었어요. 1990년대 초반에는 미국에서도 상당한 액수였지요.”
그러나 4년 만에 모처럼 얻은 휴가는 전도 유망한 청년의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서 3개월 만에 깨어나 큰 수술을 여러 번 했지만, 3년을 꼬박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걷는 것은 물론, 말하고 보고 듣는 것조차 쉽지 않아 1급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사고 이후 내 모습을 들여다볼 때마다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지만, 불현듯 원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열심히 재활 훈련에 매달렸다. 덕분에 전동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하기는 했지만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컴퓨터(PC)를 만지게 됐다. 이를 통해 PC통신 ‘유니텔’에 접속하면서 현재 부인 이정순씨를 만났고 99년에 결혼을 했다. 이듬해 귀여운 아들 준영이도 얻었다. 그의 두 번째 기적이었다.
■ 사회복지사로 제3의 기적을 꿈꾸며
그의 세 번째 기적은 KT의 IT서포터즈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을 알아보던 중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한 소외계층 지원 프로그램인 IT서포터즈를 알게 됐다. 그는 지난해 3월부터 11월 말까지 IT서포터즈 김재현 팀장에게서 ‘포토샵’, ‘오피스’ 등 각종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활용법을 배웠다. 당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교육장까지 결석은 물론이고 지각 한 번 없이 열심히 다녔다. 이동이 쉽지 않은 중증 장애인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김씨는 그때 배운 기술로 개인 홈페이지(sycronn.cafe24.com)도 만들었다. 여기에는 그가 출연한 KT 광고영상과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 준영이의 재롱을 담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다른 사람들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새로운 내용을 올려놓는 게 너무 즐거워요.” 그의 개인 홈페이지는 남중수 KT 사장도 둘러볼 만큼 관심을 끌고 있다.
김씨는 요즘 전동 휠체어를 타고 서부장애인복지관으로 매일 출근한다. 이곳에서 IT 보조교사로 일하며 장애인들에게 컴퓨터 가르치는 일을 돕고 있다. 30분 가량 걸리는 출근길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남을 돕는다는 즐거움이 워낙 크기 ㏏?甄?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우리 현실이 그를 안타깝게 할 때가 많다. “인도가 경사져 있거나 울퉁불퉁해 휠체어로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렇다 보니 어떤 장애인은 차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지요.”
김씨의 꿈은 사회복지 분야에서 역할을 찾는 것이다. “다른 욕심은 없어요. 그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들러 아들의 동영상을 볼 때마다 아빠가 아파서 같이 못 놀아주는 게 미안할 뿐이다. 그래서 사회복지사의 꿈에 더욱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좋은 아빠로 남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남들도 그럴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 KT 'IT서포터즈' / 718명 직원 '지식 기부' 자발적 참여
KT의 IT서포터즈는 특별하다. 기업들의 일반적인 사회공헌 활동과 달리 컴퓨터와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을 매개로 하기 때문이다.
2007년 2월 발족한 IT서포터즈는 전 국민의 IT 활용도를 높여 삶의 질을 향상시켜보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이길주 KT 상무는 "지식 기부라는 새로운 기부 문화의 정착이 목표"라며 "단순 사회공헌 활동에서 벗어나 수혜자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KT는 전 직원 3만여명 가운데 전적으로 봉사에 헌신할 직원들을 자발적으로 모집한다. 심지어 근무까지 제외시키고 1년 동안 IT서포터즈에 매달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 덕분에 지난해와 올해 718명의 직원이 IT서포터즈로 활동했다. 김재현 IT서포터즈 팀장은 "직원들 입장에서도 IT서포터즈 활동은 반가운 일"이라며 "1년 동안 업무를 떠나 나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며, 아울러 보람있는 직장에 다닌다는 자긍심을 갖게 만든다"고 말했다.
IT서포터즈가 도움을 주는 대상은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선발한다. 재단 측이 KT에 지원을 요청하면 IT서포터즈가 출동하는 식이다. 아름다운재단의 능력만으로는 지원이 벅찰 경우 KT가 직접 지원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KT는 인건비를 포함, 연간 430억원의 비용을 집행하고 있다.
그 동안 IT서포터즈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귀화를 원하는 결혼 이민자들이 IT서포터즈의 도움으로 인터넷 활용법을 배워 귀화시험에 필요한 우리 역사, 사회, 생활지식 등을 공부하고 합격한 사례부터 불우 청소년들이 IT 교육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다양하다. 김 팀장은 "김정대씨와 같이 하반신 마비 등 중증 장애인들이 IT 교육을 받고 재활의 기회를 갖게 됐을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IT서포터즈의 활동은 KT가 통신서비스 업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고 '인간적인 기업'이라는 따뜻한 이미지를 갖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업이 돈 많이 버는 기업이었다면, 21세기는 새로운 모델로 존경 받는 기업이 등장해야 한다"며 KT의 IT서포터즈 활동을 기업이 추구해야 할 미래형 사회공헌 활동으로 지목했다.
KT는 앞으로도 IT서포터즈 활동을 꾸준히 추진할 계획이다. KT 관계자는 "고객과 기업의 거리를 좁혀 상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 더 많은 소외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 다음 회는 삼성카드 휠체어 마라톤 전문봉사팀의 도움을 받아 국제대회에서 2위에 입상한 이유미(28)씨 편으로, 30일(금)자에 실립니다.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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