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지만 한미 쇠고기 재협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여부로 시끄럽다. 탄핵 후폭풍으로 문을 열었던 17대 국회는 결국 마지막까지 여야 간 극한 대결 속에 막을 내리게 됐다.
17대 국회는 사실상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첫해엔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처리를 두고 수차례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극심한 이념 대립이 빚어졌다.
이후에도 사립학교법 재개정 논란으로 사회적 갈등을 불렀고,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각종 부동산 관련 입법안, 비정규직 관련 3법 제ㆍ개정, 한미 FTA 체결, 국민연금법 개정 등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급기야 임기 4년차인 지난해 마지막 정기국회에서도 ‘BBK 특검법’ 처리를 두고 여야는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했다. 시급한 민생현안 해결을 위해 소집된 이번 4월 임시국회 역시 쇠고기 문제와 비준안 처리 문제로 상대방에 대한 비난전만 치열하다.
이렇다 보니 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새해 예산안이 각종 정치 현안의 볼모가 되면서 헌법에 규정된 기일을 넘겨서야 겨우 처리됐다. 여야가 말로는 민생을 외쳤지만 17대 초반에 제출된 등록금 상한제 관련법 등 수많은 민생법안들이 자동폐기되는 처지가 됐다.
17대 국회가 출발할 때만 해도 국민의 기대감은 상당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있은 지 한달여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확보해 안정적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탄핵역풍으로 인해 대대적 정치권 물갈이가 이뤄지면서 초선의원 비율이 사상 최대인 62.5%에 달했고, 이는 참신하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어엿하게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해온 진보진영이 50년 만에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이념적으로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욱이 17대 국회는 이전에 비해 공개석상에서의 독설과 비난이 난무하는 정도가 훨씬 심했다.
현역의원 신분의 국무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제1야당을 향해 ‘차떼기당’ 운운해 정국 경색을 자초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면책특권을 앞세워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에 대한 의도적 색깔공세를 반복했다.
물론 수치상으로만 보면 17대 국회는 이전 국회에 비해 입법부 본래의 기능에 가장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의원발의 법안 처리 건수는 3,258건으로 16대(1,912) 국회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의원 1인당 처리 건수도 두 자릿수인 10.9건으로 16대(7건)를 훨씬 상회했다.
일각에선 여야 간 물리적 충돌 횟수도 이전 국회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는 점에서 17대 국회를 마냥 비판적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반론도 내놓는다.
하지만 17대 국회가 외견상 나타난 풍성함에 비해 초라한 평가를 받는 데는 주요 정당과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이미지는 ‘오만’과 ‘독선’으로 굳어졌고, 주력군이었던 386정치인은 18대 총선에서 대거 낙마했다.
2002년 불법대선자금으로 곤욕을 치렀던 한나라당은 2006년 지방선거 당시 공천헌금 파문으로 스스로 부패정당의 이미지를 덧씌웠고, 숱한 성추행ㆍ성폭행 사건에 휩싸이면서 ‘성추행당’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 역시 의정활동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급기야는 일심회 사건의 여파로 평등파가 당을 뛰쳐나가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등 분열상까지 보였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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