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흔히 ‘경제의 혈액’으로 비유된다. 우리 몸의 피처럼 돈이 잘 돌아야 경제가 건강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경제의 혈액’ 역할을 해온 은행권에 요즘 동맥경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증시로 돈이 옮겨가는 ‘머니무브’ 현상과 과도한 부동산대출에 따른 ‘신용버블’ 우려, 수익성과 건전성 동시 악화 등 은행을 둘러싼 악재는 첩첩산중이다.
우선 국내 은행들의 최대 수익원은 대출을 해주고 받는 이자 수입이지만, 더 이상 빌려줄 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최근 수년간 사상 최대 이익잔치의 토대였던 과거 부실기업 매각차익도 이제 바닥이 났다. 예금으로 꾸준히 돈을 공급하던 사람들이 갈수록 주식투자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데다, 최근의 주가 상승으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렇다고 대출을 포기할 수 없어 채권 발행을 늘려 자금 확보에 나서다 보니, 수익성은 날로 떨어지는 추세다.
시중은행들이 양도성예금증서(CD)와 은행채 등을 통해 조달하는 시장성 수신 잔액은 4월 말 현재 283조2,570억원으로 정기예금 잔액(306조7,653억원)에 거의 육박했다. 시장성 수신은 지난해 12월부터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대출을 위한 실탄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이자가 거의 없는 요구불예금에 비해 원가가 비싼 시장성 수신이 늘어나면 당장 조달비용 상승은 물론, 안정적 조달도 어려워진다. 은행장들도 최근 간담회에서 “시장성 수신이 늘어나면 순이자마진이 줄고 유동성 리스크가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처럼 대출자원 마련이 ‘고비용 구조’로 바뀌면서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일로다. 수익창출 능력의 핵심지표인 순이자마진(NIM)은 2005년 2.81%에서 올해 1분기 2.38%까지 떨어졌다. 미국의 총자산 100억달러 이상 상업은행들의 지난해 평균 NIM 3.17%와 차이가 크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경쟁을 할 때는 대출 금리를 쉽게 올릴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면 순이자마진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국제신용평가회사와 투자은행들도 국내 은행의 수익성 악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19일 급격히 늘어난 중소기업 대출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당분간 국내 은행들의 신용도가 시험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S&P는 “지난해 시중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을 비롯한 기업여신이 20% 이상 늘었는데, 증가한 여신이 경기둔화와 맞물릴 경우 은행권의 자산건전성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시중은행들의 신용도는 아직 안정적이지만 앞으로 수 분기 동안 시험기간을 거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S&P는 “수출 중심의 한국경제가 대외변수에 취약하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며 “은행들이 건설경기 침체에 따른 중소건설사 부도와 제2금융권 부실에 따른 간접손실, 외화조달환경 악화 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UBS는 부동산과 연결된 신용버블을 경계했다. 던컨 울드리지 아시아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0일 “한국은 민간부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이 171%로, 서브프라임 사태를 촉발한 미국(169%)이나 영국, 호주와 비슷한 수준을 나타내는 등 신용버블 상태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과 달리 지방의 부동산 침체에도 불구,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고질적인 주택난 탓에 부동산 가격 붕괴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부동산 문제가 미국처럼 은행의 위기까지 몰고 오진 않겠지만 경제성장에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골드만삭스의 권구훈 이코노미스트도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과 함께 예금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은행의 순이자마진이 지속적으로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연구원 구본성 연구위원은 “향후 은행들의 경영성과는 순이자마진의 안정화와 연체율의 효과적인 관리 여부에 따라 차별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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