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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미술품 경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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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미술품 경매사

입력
2008.05.2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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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고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이 등장한다.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수채화 한 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무대 위 여성과 미술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눈동자 움직임이 빨라진다. 모두들 그녀의 손만 바라본다. 300만원에서 시작한 경매가가 순식간에 1,000만원에 도달하자 입찰자 10여명 중 2명만 남았다.

무대 위 여성이 두 명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며 1,250만원을 부르자 순간 정적이 흐르고 한명이 조용히 손을 든다. 10초 가량이 지났을까 그녀의 입에서 ‘낙찰’이라는 말이 떨어진다. 그녀와 최종 낙찰자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미술품 경매가 이뤄졌다.

흔히 미술품 경매사를 ‘무대 위의 지휘자’라고 부른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손짓 하나로 고객들을 울고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술품 경매사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만원에서 수백억원 하는 미술작품을 다루다 보니 화려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경매사들의 세계를 들여 다 보면 이 같은 선입견은 사라진다. 하나의 미술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기까지 수많은 고통과 노력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품 수집부터 평가, 감정의뢰, 작품의 특징과 가치를 설명하는 ‘도록’ 제작까지 도맡아 한다. 소장자로부터 작품을 경매에 내놓는 설득 과정은 ‘삼고초려’(三苦草慮)까지 해야 한다.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사 1호인 박혜경(41) 이사를 비롯해 4년차인 곽혜란(30) 김현희(27)씨, 1년차인 김은정(27)씨 등 서울옥션의 경매사 4인을 통해 미술품 경매사들의 세계를 들여 다 봤다.

이들은 미술품 경매사의 역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일반인들이 미술품 경매사 하면 경매 진행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경매사의 역할은 훨씬 넓다는 것이다. 박 이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경매사는 경매의 기획자라고 할 수 있어요. 경매가 이뤄지는 모든 과정을 꿰뚫고 있어야만 해요. 작품을 수거하는 일부터 감정, 촬영, 전시, 경매 진행 및 판매까지 모두 경매사의 몫이에요.”

선배의 말에 후배들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곽혜란 경매사는 “순발력, 재치, 지식, 매너를 겸비해야 경매사가 될 수 있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경매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경매사만이 갖고 있는 고충과 애환도 털어 놓았다. 작품 가격이 높든, 낮든 간에 경매장에 서면 긴장감으로 입이 바짝 마르고,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른다는 것. 박 이사는 “아직도 경매장에 서면 긴장된다”며 “경매 당일에는 발성이나 발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점심도 거르고 커피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현희 경매사는 “경매를 할 때 가끔 유찰할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가 가장 힘들다”며 “경매사가 의뢰 작품을 제값에 낙찰 받지 못하거나 유찰될 경우 고객들로부터 항의와 추궁을 듣기도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은 이들이 미술품 경매사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박 이사는 15년 전 대기업 홍보실에서 방송과 문화뉴스 등 사내 아나운서를 하다 그녀의 능력과 끼를 눈 여겨 본 가나아트센터에 미술품 경매사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미술품 판매 및 전시 사업을 하던 가나아트가 미술품 경매 사업을 시작하며 그녀를 경매사로 점 찍었던 것. 박 이사는 “대학 때 전공이 사학으로 미술품에는 거의 문외한이었으나 미술품 경매사라는 직업에 끌려 시작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김현희 경매사도 대학원 때 미술사학을 공부하며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돼 경매사가 됐다고 했다. 곽 경매사는 회화과를 졸업한 후 갤러리에서 전시 기획을 하다 이 길로 들어섰다. 막내인 김은정 경매사도 어릴 때부터 미술을 전공하다 작가의 꿈을 버리고 경매사가 됐다.

미술품 경매사는 반드시 미술을 전공하고 자격 시험을 거쳐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박 이사는 “경매사가 되기 위한 정규 코스는 없다”며 “경매회사에 입사해 작품 판매를 담당하는 스페셜리스트로 경험을 쌓고 실력을 인정 받으면 경매사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박 이사는 10년 전 경매사가 처음 됐을 때는 지금 같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국내에 경매사가 전무해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에 가서 경매 현장을 보며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사진을 찍거나 녹음을 못하게 해 경매사 말투나 기술 등을 수첩에 적어야 했죠. 그리고 경매 관련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배우기도 했죠. 지금과 비교하면 열악했어요.”

직업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김은정 경매사는 “수백명의 고객들이 나의 입과 손에 집중하고, 마침내 그림의 주인이 결정될 때 희열은 경매사만이 느낄 수 있다”며 “화려한 겉 모습과 달리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등 고단한 생활이지만 미술 산업의 첨병 역할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곽 경매사는 “신인 작가나 진흙 속에 묻힌 작품들을 발굴해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 게 임무이자 책임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박 이사는 경매사가 되고 싶은 많은 예비 경매사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경매사가 되기 위해 꼭 미술을 전공할 필요는 없어요. 꾸준히 발품을 팔아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작품을 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유인호 기자 yih@hk.co.kr사진=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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