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 두 번째 화요일, 연방 하원의원 선거 마지막 본선 투표 날이다. 대개 투표소는 새벽 7시부터 밤 8시까지 연다. 동네 개인 집이나 학교 등 찾기 쉽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투표소를 설치한다. 투표소에서 4분의 1마일(402m) 거리 내에서는 일체 선거 인쇄물을 돌리지 못하게 돼 있어서 투표일 당일은 아예 선거운동을 중지한다.
나는 이제 기다리는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 새벽에 교회에 혼자 나가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본선이다. 공화당 후보로 나선 나 제이 김과 민주당 후보 공천을 받은 밥 베이커 둘 사이의 마지막 경쟁이다.
개표 결과 자그만치 60% 대 30%, 2대 1이란 압도적인 표차로 내가 당선됐다.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수많은 기자들, 카메라 앞에서 나는 별안간 미국정치 역사의 영웅이 돼 버렸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기자들도 50명이 넘게 몰려 왔다. 당선 소감을 묻는데 할 말을 잊었다. 내가 정말 미국의 국회의원이 됐단 말인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선 선거 참모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 드렸다. 그리고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미국 국회는 선거가 있은 다음 해 1월 3일에 개회한다. 당선자들은 그 때 국회에 가서 선서할 때까지는 국회의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국회의원 당선자라고 부른다.
당선자로 있을 때 얘기다. 미국 내 중국인들은 세 그룹이 있다. 중국 본토 출신, 대만 출신, 그리고 홍콩 출신 등. 대만 출신은 만다린이란 언어를 쓰고 홍콩 출신은 캔토니즈를 쓰기 때문에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이 필요하다. 그 당시엔 중국 본토 출신은 미국서 별로 힘을 못 썼고 북가주, 샌프란시스코 근방은 홍콩계 중국인, 그리고 내가 있는 남가주 지역은 주로 대만 출신 중국인들이 밀집해 살았다. 우리 옆 동네엔 대만 타운이 있고, 사업에 성공한 대만계 기업인들이 많았다.
하루는 나를 도와준 대만계 중국인 다섯 명이 찾아와 함께 대만과 홍콩,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자는 제의를 했다. 이들은 이등휘 대만 총통의 초청장까지 들고 왔다.
따라 나서기로 하고, 일주일 뒤 대만에 도착했다. 그 때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아보긴 일생 처음이었다. 비행장에 마중 나온 수십 명의 환영객과 기자들에 둘러 쌓여 슈퍼 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만 같이 미국서 로비 활동을 열심히 하는 나라도 없다. 아마도 이스라엘 다음일 것이다. 저녁 초대를 받아 식당에 갈 때도 경찰이 오? 카를 타고 앞장 서 교통정리를 해 가며 안내해 준다. 외국 국빈들을 극진히 대접하기는 대만이 최고라는 말이 맞다. 그래서 한번 다녀온 사람들은 대만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대만은 국가가 아니다. 한국도 미국과 함께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고 대만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만은 강대국 미국에 바짝 매달려 웬만한 독립국보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 당시 대만의 가장 큰 정치적 이슈는 친 중국파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파의 대립이었다. 이 두 파가 갈라져 서로 대결하는 모습은 치열하다. 죽기살기 같아 보인다. 이 대결이 미국에까지 이어져 내 지역구 안에서도 같은 대만인끼리 두 파가 갈라져 심지어는 치고 받는 일까지 벌어졌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 명이 매맞아 죽기까지 했다. 나도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대만이 중국에 흡수당할 것, 자고로 대국 편을 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한 게 아닐까 하는 판단 아래 나는 친 중국 편을 들었다. 이것이 문제가 돼 대만 독립신문으로부터 거의 매일 공격을 받았지만 대신 중국 본토에서는 이런 나를 좋아했다. 그 당시로는 중국이 오늘날 같은 경제대국이 될 줄은 예측 못했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중국의 대영토가 머잖아 다섯개 독립국(대만, 홍콩, 티베트, 관동, 중국)으로 분열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이듬 해 미국 하원의장 뉴트 깅그리치와 함께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대만의 이등휘 총통이 내게 제일 먼저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던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면서 노골적으로 섭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여튼 조그만 섬인 이 나라가 그 당시 무역으로 세계를 휘어 잡으며 ‘메이드 인 타이완(Made in Taiwan)’이 판을 칠 당시였다.
대만에 이틀을 머물면서 정말 관광할만한 곳이 별로 없는 나라라고 느꼈다. 이틀 뒤 홍콩에 도착했다. 아직도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다. 1842년으로부터 155년 뒤인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해방돼 중국으로 반환될 당시 영국인 총통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이임식 때 미 의회를 대표해 하원의장이던 깅그리치와 함께 참석했었다. 영국 국기를 서서히 내리면서 영국 물「?부를 때 행사에 참석한 모든 영국인들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무척 슬피 우는 모습을 보았고, 밖에서는 독립을 반기는 중국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One Country, Two Systems” (한 국가 두 제도)로 홍콩은 중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자치권(Autonomy)을 50년 뒤 2047년까지는 행사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저녁 만찬에는 홍콩의 유지들이 다 모였었다. 이상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할 때 그 사람의 재산이 얼마인지, 빌딩을 몇 개 갖고 있는지 주로 부(Wealthy)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역시 오랜 식민지 생활 속에 정부 고위직에 올라갈 순 없고 검사 판사도 없고, 시장은 물론 도지사도 없고– 이러니 결국 재산의 정도로 사람들을 가늠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생각했다. 불쌍한 일이다.
한국의 고학생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 국회의원이 된 나를 쳐다보는 그들에게서 나는 말할 수 없이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기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영국의 국회의원이 된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가 보다.
나는 공연히 우쭐해졌다.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으로 홍콩에서 꿈같은 이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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