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53)씨가 다섯 번째 소설집 <라일락 향기> (실천문학사 발행)를 펴냈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1998) 이후 10년만에 묶어내는 소설집이다. 내> 라일락>
수록작 7편은 1999년 말 발표된 ‘개구리’를 빼면 모두 2003~2008년 발표작들이다. 작가가 책 말미에 꽤 길게 붙여놓은 ‘작가의 말’과 작년에 출간한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 을 먼저 읽어둔다면 작품 이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듯하다. 나쓰메>
서양 고전을 작품 모티프로 즐겨 쓰는 작가의 창작법-일례로 중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하인리히 뵐의 장편의 제목과 구절을 차용했고, 장편 <낯선 사람들> 은 주제ㆍ인물 설정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닮았다-은 이번 수록작의 몇몇에도 적용된다. 카라마조프가의> 낯선> 그리고>
표제작에서 주인공은 재개발 구역에 편입된 노모의 퇴락한 집 마당에 별세한 아버지가 좋아했던 라일락 나무를 심는다. 김씨는 이 작품에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로 시작되는 T.S.엘리엇의 시 <황무지> 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황무지>
공사장 아래를 지나다가 이마에 벽돌을 맞은 후 기억 상실을 겪는 노숙자 실직 가장의 에피소드를 다룬 ‘나는 몽유하리라’는 김신용 시인의 시 ‘몽유 속을 걷다’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혹은 헤겔을 위한 변명’이란 부제를 달까 고민했다는 ‘개구리’를 비롯, 몇몇 단편엔 헤겔의 사유가 인용되고 녹아있다. 깊은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한 이런 상호텍스트성 기법엔 소설 쓰기를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잘 알려졌듯이 김씨는 1990년 출간한 첫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를 통해 민중문학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소위 ‘김영현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작가다. 현실사회주의 붕괴 후 새로운 지향과 사유를 모색해온 작가의 고민이 수록작들의 연대기에서도 감지된다. 깊은>
가장 먼저 쓰여진 ‘개구리’ 속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식인부터, 삶과 추억이 묻은 낡은 집을 재개발로부터 지키려는 표제작의 노모까지 수록작 대부분엔 폭력과 억압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 일변으로 치닫는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핍박받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인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조금씩 변해간다. 그 변화는 여러 갈래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것이겠지만, 그 중엔 깊은 회의와 자기 유폐에서 점차 연민과 조심스러운 낙관으로 향하는 흐름도 감지된다.
일테면 단편 ‘일영에서 보낸 나날들’에서 지인의 빈 화실을 작업실로 쓸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주인공이 한달째 머무는 낡은 여관은 이념적 좌표를 잃어버린 자의 자폐적 공간으로 읽힌다.
그에 비해 생판 모르는 공장 노동자 출신 남자의 비극적 개인사를 들어주는 대낮 술자리(‘낯선 사내와 술 한잔’)나, 표제작 주인공이 개발의 대세를 거슬러 한 그루 나무를 심는 마당엔 비인간화 돼가는 세계에 맞서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의지와 연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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