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양서와 악서의 차이를 비교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악서는 이래서 나쁘고 저래서 안 좋으니 읽지마라는 글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섭렵하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지상 명령이다. 살아 오는 동안 ‘하라’와 ‘하지 말라’의 홍수 속에서 발버둥 쳤음을 자인할 때, 양서–악서의 구분은 하찮은 핑계거리 일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어디 그런 식으로 양서 따로, 악서 따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속상하기도 하지.
인생은 경험의 축적이다. 그 범위는 사람에 따라 확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한다. 살면서 부딪치며 느끼는 직접 경험이 삶의 지표를 결정하는 필요 조건이라면, 책을 통한 간접 경험 또한 삶을 좌우하는 충분 조건으로 작용하여, 인격을 형성하고 인생을 꾸미는 역할을 담당한다. 직접 경험은 스스로의 체험이거니와, 간접 경험인 책의 영향은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그러니까 ‘무엇을’의 근본적인 얘기가 ‘어떻게’의 문법적 선택을 능가해야 한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 문제에 다다르면 한 사람의 인생이 축약되지만, 어떻게라는 방법적인 문제로 그치고 만다면 삶이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이렇다. 열심히 읽다 보면 재미가 생기고 나름대로 빠지기도 한다. 그것은 좋고 나쁨의 이전에 일종의 중독 증세다. 그러다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세상사 조금 알게 되어 말장난 조잘거릴 때쯤 되면 그제서야 책을 고르고 뒤를 따르기 마련인데, 이쯤 돼야 자신의 그릇 하나쯤 갖게 된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한다는 점이고….
헌데 미련도 하지, 그 때서야 수많은 함정에 빠질 줄이야. 책과 인생은 닮은 데가 있다. 잘 살아야 하듯 잘 써야 하고 잘 읽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들이 몇 번의 텀(term)을 이뤄 반복되다 보면 자신의 그릇이 점점 뚜렷이 확인된다. 그것을 지켜 보는 즐거움에, 또 다시 책을 고르는 유혹에 기꺼이 빠져든다.
강영걸(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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