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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목신의 어떤 오후' 토막난 의식으로 生을 음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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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목신의 어떤 오후' 토막난 의식으로 生을 음미하다

입력
2008.05.1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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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 지음/문학동네 발행ㆍ304쪽ㆍ1만원

정영문(43)씨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중편 <하품> 을 낸 지 2년 만이고, 소설집으론 <꿈> 이후 5년 만이다. ‘중얼거리듯 발화되는 권태로운 자의 의식 흐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정씨의 문학적 개성은 이번 수록작 10편에도 오롯하다.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는 사소하거나 희미하다. 사건과 풍경은 맥없이 작중 화자를 스치지만, 그 미약한 자극만으로도 그들의 의식은 활발히 유동한다. 개개의 생각과 연상을 전하는 정씨의 문장은 단단하다.

단어는 평이하면서도 적확하며 완벽한 문법틀에 엮여 있다. 다만 그 문장이 어이지면서 드러나는 화자들의 의식은 두서 없고 정처 없다. 우리가 홀로, 혹은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있을 때 머릿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그렇듯.

작가의 말도, 해설도 없는 이 책의 머리에 배치된 단편 ‘브라운 부인’은 비교적 스토리라인이 분명하다. ‘브라운’을 성(姓)으로 가진 미국인 남편과 살고 있는 한국계 여성의 외딴 집에 10대 후반쯤 돼보이는 소년이 총을 들고 들어온다. 아이의 강도짓은 서툴고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부부의 불안은 곧 가신다.

남편과의 생활에 권태와 불만이 쌓여가던 주인공 여성은 어린 강도에게 치질약을 건네주고, 노래하는 그를 위해 피아노 반주를 해주는 상황이 전혀 부조리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자연스런 일상의 어떤 부분들이 더욱 부조리하게 여겨졌다.”(29쪽)

‘여행의 즐거움’은 양성애자 친구 K를 두고 여행을 떠난 두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의 친구 K와, 남자가 한때 좋아했던 여자는 남자를 통해 만나 지금은 연인 관계다. 여자가 “K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거듭 말하는 바람에 여행길 초반은 어색하지만, 두 남녀는 서로의 경험과 상상을 맥락없이 늘어놓는 가운데 이전의 친밀감을 회복해간다.

드뷔시의 관현악곡으로도 만들어진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 를 패러디한 제목의 표제작에도 세 남녀-근친애 관계인 사촌 남매와 그들의 남자친구-가 나온다. 호숫가 숲을 배경으로 셋의 과거, 꿈, 풍경에 대한 인상 등이 혼재되면서 현실 저층에 자리한, 생의 원형질 같은 물컹미끈한 것을 그려낸다.

단아한 문장들이 빚어내는 혼곤하고도 불가지(不可知)한 내용들은 당혹스럽다가도 왠지 모를 편안함을 자아낸다. 생의 비밀을 엿본 자가 겪을 만한 감정의 기복처럼. 단편 ‘추억의 한 방식’ 속 한 구절은 정영문 소설을 읽는 법에 대한 작가의 조언처럼 읽힌다. “우리가 즐긴 것은 우리의 두서없는 이야기 속의 말들이 어떤 리듬이 느껴지게 반복되고 중첩되는 느낌과 그 느낌이 주는 지지부진한 느낌이었다.”(131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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