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채식을 하는가?” 채식주의자라면 숱하게 들었을 질문이다. 단순히 노릇노릇 쫄깃쫄깃 구운 고기 씹는 맛을 포기하고, 우적우적 밋밋한 풀떼기를 물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다. 삼겹살과 소주, 2차 3차 폭탄주 릴레이로 대변되는 회식과 접대 문화에 딴지를 거는 고약한 행위의 이유를 묻고 있다.
광우병 파동, 육류 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 등 육식에 반대하는 사회의식은 있지만 누구처럼 발벗고 나서서 채식을 강요할 생각까지는 없고, 단지 라이프 스타일을 지키며 살고 싶은 사람들. 2008년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Vegetarian)로, ‘베지코리안’(Vege-korean)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식 주간(19~25일)을 맞아 들어봤다.
# 힘이나 쓰겠냐?
괴롭다. 또 시작이다. 남들에게는 구수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이지만 내 눈에는 지글지글 구겨지다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내 얼굴처럼 보인다. 오늘도 김 부장이 닥달이다. “저 녀석은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길래 산해진미를 숨겨두고 먹나 했더니, 밥을 보니 파래 범벅이야.
그래서, 사내 자식이 힘이나 쓰겠냐?” “조직생활을 하려면 말이지, 둥글둥글 구르면서 살아야지. 내부는 그렇다 쳐도, 외부인 접대도 야채만 늘어놓고 할래?” 기기묘묘한 폭탄주 세리머니가 이어지고, 술잔을 따라 머리는 자꾸 빙빙 돈다.
“2년 전쯤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했어요. 평소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인데, 실연 당하고 직장도 옮기면서 스트레스가 심해져 폭식을 하게 됐어요. 고혈압에 비만으로 병원에서 성인병 위험 판정을 받고는 채식을 시작하게 됐죠. 회사 사람들이 알 턱이 있나요. 젊은 사람들은 이해해주지만 상사들은 아직까지 ‘이상한 놈’ 쳐다보듯 해요. 스트레스죠.” - 입사 3년차 회사원 박모(31)씨.
“혹시 불교냐, 고기 좀 먹어봐라. 흔히들 그래요. 한국에서 채식한다는 것, 매우 어려운 일이죠. 채식주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데다 삼겹살에 소주로 굳어진 회식문화에서 채식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아요. 한국에서 채식을 한다는 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키겠다는 자세와 더불어, 육식을 권하는 유무형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죠.” – 영어학원 강사 이모(32)씨.
# 살은 왜 안 빠지냐?
“그래서?”라고 되묻고 싶지만, 구차하게 뭘. 채식하는 사람들은 낯빛이 맑아지고 살도 빠진다는데, 막상 채식을 시작한 지 6년째 접어들지만 외형상의 변화가 전혀 없다. 그러게, 나는 사이비인가보지. 그래도 내 난폭한 성격은 좀 누그러진 것 같지 않아? 허허….
생각과는 달리 실상 한국에서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많지 않다. 달걀만 먹거나(Ovo vegetarian), 유제품도 먹거나(Lacto-ovo vegetarian), 닭고기까지 먹거나(Pollo vegetarian),
아예 고기까지 가끔 먹는(Semi vegetarian) 채식주의자 등 다양하다. 순전히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물보호나 환경을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채식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거의 매일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광’이었죠. 2003년 1월쯤 영화계 식구들하고 역시나 삼겹살을 먹는데 프로듀서 한 녀석이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친구가 언젠가 청량리 경동시장에 들어섰는데 식용으로 팔려가는 개들이, 생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애완 유기견들이 그렇게 많았대요. 저도 유기견을 데려다 키우고 있는데 ‘우리 개도 길을 잃으면 그 꼴 나겠구나’ 싶으니까, 더는 육류를 못 먹겠더라구요.” – 영화감독 임순례(47)씨.
“그렇게 따지면 물고기나 풀은 왜 먹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죠. 혹시 동물의 목축이나 도축 과정 보셨나요. 고개도 못 가눌 정도로 비좁은 돼지우리, 부리가 잘린 채로 서로의 머리를 쪼는 닭들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까요. 이제 생고기를 보면 부분 덩어리가 아니라, 동물의 전체 형체가 떠올라서 괴로워요.” - 김이혜연(30)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 연구원.
이현정기자 agada20@hk.co.kr강명석객원기자 lennone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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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의 오해와 진실 영양소 결핍 걱정은 기우
1970~80년대 미국 프로농구 코트를 종횡무진했던 빌 월튼은 몸싸움에 능했던 206㎝의 공룡 센터였다. 스테이크 굽는 냄새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날 듯 건장했던 그의 별명은 ‘코트의 채식 호랑이’. 평생 채식을 했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채식주의자가 늘고 있다지만 채식에 대한 잘못된 상식이 진실로 오인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에게서 채식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들어봤다.
▲ 단백질 결핍 문제 없나
채식은 단백질 부족이나 영양소 결핍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콩이 지닌 단백질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보다 2배 이상이다. 두부나 된장, 콩나물 등의 섭취로 단백질은 충분하다. 현미잡곡밥만 먹어도 하루의 필수 영양소가 거의 해결된다. 요즘은 영양 부족보다 과잉이 문제다. 채식에 따른 영양 부족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운동선수는 육식이 기본 아닌가.
힘을 쓰는 것은 근육이다. 고기를 먹어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운동의 원천은 단백질이나 지방이 아니라 탄수화물이다. “앉은자리에서 삼겹살 5인분 이상은 먹어야 힘을 쓴다”는 일부 운동선수의 너스레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
▲ 채식은 어떻게 시작하나
단숨에 육식을 끊는 게 가장 좋다. 육식의 갖은 유혹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기를 끊기 힘들면 단계적으로 채식을 하는 게 좋다. 우선 현미잡곡밥과 두부를 많이 접하는 식으로 육식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취하면 된다.
▲ 달걀과 우유 섭취도 육식인가
달걀과 우유 섭취도 엄격히 따지면 육식이다. 우유를 건강식품이라고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요즘엔 소나 닭을 좁은 공간에 가두고 항생제 등을 먹여 기르기에 우유와 달걀은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
▲ 채식주의자는 젓갈 없는 김치를 먹어야 하나
맞다. 젓갈은 동물의 사체를 부패시켜 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젓갈과 채소가 만나면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이 생긴다는 연구가 있다. 젓갈 없이 담근 김치를 먹는 게 좋다. 젓갈을 빼면 김치 맛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일뿐이다. 젓갈을 빼면 김치 맛이 더 좋아진다.
▲ 채식하면 무조건 살이 빠지나
그렇진 않다. 채식을 해도 많이 먹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이 찐다. 그러나 채식을 하면 육식을 했을 때보다 탐식이나 폭식이 많이 줄어든다. 그래서 다이어트에는 유리하다. 반면 마른 사람의 경우 채식을 하면 정상체중에 가까워질 수 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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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단
제 몸 핥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 갇혀 ‘고기’로 자라는 동물들의 모습이 가슴 아파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고깃집 앞을 지날 때면, 역겨운 느낌이 들 새도 없이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대뇌 속은 푸성귀로 가득하지만 입 속에는 아직 열육치(裂肉齒)가 번득이는 초보 채식주의자의 고민이다. 채식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식습관을 소개한다.
■ 호두, 땅콩, 밤, 아몬드
고기를 즐겨 먹다가 갑자기 채식으로 전환하면 기력이 쇠해진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이들은 규칙적으로 견과류를 섭취하면 좋다. 식물성 지방이 풍부한 견과류는 열량이 비교적 풍부해 든든한 느낌을 준다. 단백질도 많으며 리놀레산 같은 필수지방산은 피부 탄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체를 구성하고 신진대사를 조절하는데 필요한 무기질과 비타민도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찹쌀밥에 밤과 대추, 잣이 들어간 약식이 본보기 음식. 단, 열량이 높으니 주의할 것.
■ 고기생각 덜어주는 콩
콩에 함유된 단백질이 고기 못지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런데 영양보다 더 큰 콩의 장점은 무한한 변신 가능성이다. 두부나 비지 뿐 아니라 콩은 씹는 느낌과 맛이 고기와 비슷한 ‘콩고기’의 재료가 된다.
슈퍼마켓에 가면 콩햄, 콩까스, 베지비프, 콩치킨, 콩스테이크 등등 정육점을 차릴 정도로 다양한 콩고기가 진열돼 있다. 불고기, 깐풍기, 너비아니 등 웬만한 육류 요리는 콩으로 다 만들 수 있다.
■ 국물맛 낼 때는 버섯과 다시마
채식은 곧 민숭맹숭한 맛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동물의 뼈와 살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감칠맛을 낼 수 있다. 국물요리에 기본이 되는 것은 표고버섯. 마른 표고버섯을 볶은 뒤 가루를 만들어 각종 찌개나 조림에 쓰면, 멸치나 고기로 만든 육수보다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낼 수 있다. 깊고 개운한 맛을 원할 때는 다시마 가루가 좋다. 들깨, 생강 가루, 현미쌀눈 가루 등도 독특한 맛을 낸다.
■ 흰 쌀밥 대신에 잡곡밥을
채식의 기본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이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물은 비타민 칼륨 마그네슘 등 무기질이 풍부하고 섬유소의 손실이 적다. 호박 대추 콩나물 등을 섞어 밥을 지을 때도 잡곡밥이 어울린다. 단, 잡곡밥은 꼭꼭 씹지 않고 빨리 삼킬 경우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위장 장애의 원인이 된다. 체질에 따라 잡곡의 종류도 가려서 넣어야 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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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딩 음식 주문도 들어와요" 북적이는 채식 레스토랑
“광우병, 조류독감(AI)이 이슈가 되기도 해서이겠지만, 요즘 들어 사람들이 부쩍 채식 전문 식당을 많이 찾는 것 같아요. 점심 때면 주변 직장인들을 포함해 40~50명의 손님이 몰릴 정도죠. 최근에는 아예 웨딩 출장음식도 채식으로 꾸며달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늘었어요.”
서울 강남구 포이동의 채식 전문 S 레스토랑은 평일인데도 오전 11시30분쯤부터 점심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유제품은 물론 생선, 오신채(五辛菜ㆍ사찰에서 먹지 않는 5가지 매운 채소, 마늘 부추 파 달래 흥거)를 쓰지 않은 음식만을 내놓는 곳이지만 손님들은 입맛을 다시며 메뉴를 집는다.
뷔페로 제공되는 이 레스토랑의 메뉴에는 불고기나 돈까스 등 고기음식을 ‘카피’한 채식 메뉴도 즐비하다. 주로 콩과 밀을 이용해 고기 모양의 경단을 만든 뒤 이를 쪄서 빵가루 등을 입힌 것으로, 겉모양은 고기 같지만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첫맛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
직원 김소연씨는 “고기를 닮은 채식요리는 사실 진짜 채식주의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진짜 채식주의자들은 음식에 고기 성분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기막히게 몸으로 느껴요. 바로 두드러기가 나거나 하거든요. 저희는 마요네즈도 두유로 만들어요”라고 말한다.
1시간 후쯤 찾아간 전철 2호선 선릉역 인근의 N 채식레스토랑. 늦은 점심시간이지만 주로 중년의 손님들이 가득 차 있다. 이 식당은 채식은 물론, 빵에 바르는 잼도 설탕을 쓰지 않고 물엿 등으로 단맛을 낼 정도로 ‘채식=건강식’이라는 등식을 맞추는데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S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콩과 밀로 만든 채식 고기요리가 준비돼 있고, 제철 채소와 쑥버무리 등이 비록 단호한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입에 군침이 돌게 만든다. 손님 한모씨는 “저녁 회식 자리를 이런 채식전문점에서 가진 적이 있는데 젊은 직장인들의 호흥이 놀라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사실 이들 식당처럼 채식전문점을 표방한 음식점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일반 음식점이 채식주의자를 위한 특별 메뉴를 몇 개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소연씨는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면서 세 끼 식사를 밖에서 해결한다는 건 정말 힘들어요. 어디서나 당당하게 채식 메뉴를 요구하기 힘들죠.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럽고요. 채식전문식당이 과연 진짜 채식주의자를 위한 곳인지 사전에 확인하고 방문해야 헛걸음을 안 하게 되죠”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채식주의자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준 채식주의자(Semi-Vegeterian)를 위한, 조금은 엉성한 채식메뉴를 찾는 것도 괜찮다. 유제품, 생선류만 허용해도 채식은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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