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 창비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파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고 했다. 호적부보다 더 완전하게 당대의 사회상을 소설로 쓰겠다는 야심이었다. 한국 시인 고은(75)은 1986년 <만인보> 를 쓰기 시작하면서 “일만 겨레를 시로 호명하겠다”고 했다. 23년째 그는 호명을 계속하고 있다. 시 한 편에 한 명씩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살다 간 사람 4,000여명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만인보> 1~9권은 1930~40년대, 10~15권은 70년대, 16~20권은 한국전쟁, 21~23권은 80년대, 24~26권은 한국불교의 인물들을 다뤘고, 90년대 이후를 다룬 30권까지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만인보> 만인보>
고은의 이 놀라운 기획을 시로 쓴 한국 현대 인물사전이라고도 하지만, <만인보> 가 사전을 넘어서는 것은 그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고은은 대부분 자신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스쳐지났던 사람들, 이제는 사료ㆍ 자료의 더미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까지 주술 들린 듯한 눈으로 꿰뚫어보며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낸다. 짧은 시 한 편 한 편이 인간의 얼굴, 역사의 초상으로 되살아난다. 만인보>
오늘 <만인보> 를 ‘오늘의 책’으로 쓰는 것은 5ㆍ16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사람들’이란 부제가 붙은 <만인보> 10~15권에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이름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박정희다. 물론 ‘박정희’란 시는 따로 한 편이 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 ‘청계천 뚝방 홍씨’에 ‘복부인 오여사’에 ‘신중현’에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이 눈길을 붙든다. 만인보> 만인보>
그렇게 책을 뒤적이는데 문득 시 한 편이 보인다. ‘23세 이사/ 35세 사장/ 46세 회장// 70년대 개발연대기에는/ 한 샐러리맨이 이렇게 솟아올랐다//…/ 부디 그의 신화가 더 이어질수록/ 개박이 악이 아니라 선이기를/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 그 제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 하고 썼던 시인은 이명박 정부의 거듭되는 실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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