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들지 못한 시간이 수년이었다. 병든 아내의 곁을 지키느라 일부러 그림 생각을 안 하며 보낸 시간들이 길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을 일으킨 ‘모내기’의 작가로 유명한 신학철(65). ‘부심이의 엄마생각’이란 제목으로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를 서울 창덕궁 앞 갤러리눈(대표 박이찬국)에서 만났다.
적은 말수에 모든 것을 범상하게 얘기하는 그의 화법은 듣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말해진 것 이상을 짐작하도록 만들었다. 읽는 이에겐 그의 겸양에 곱하기 부호를 붙히는 기술이 필요하다.
- 이번 개인전이 다섯 번째세요. 생각보다 너무 적어서 놀랐어요.
“게을러서 그렇다고 봐야죠.(웃음) 제가 일부러 날짜를 잡아놓고 개인전을 한 적이 없어요. 계기가 있어서 할 수 없이 했지. 이번 전시도 삽화 정도 그리는 거다 생각했지 전람회는 생각도 안 했어요.”
-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이 모두 30점인데, 전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자전 에세이 ‘부심이의 엄마생각’ 내용을 그린 거잖아요.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처음엔 백 선생님이 표지를 그려달라고 하셔서 그려드렸어요. 고맙다고 술을 한 잔 사시겠다고 해서 나갔는데, 삽화를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데요. 어려울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서…. 술김에 그러자 하고, 3년간 짬짬이 그렸어요.
삽화지만 그냥 펜으로 그린다든가 하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유화로 그렸죠. 그랬더니 백 선생님이 이번엔 전시를 하자고 계속 그러데예. 마지 못해서 했어요.” (백 소장과 그는 80년대 초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 그는 백 소장이 계획 중인 노나메기 문화원을 짓는 데 쓰라며 그림 전부를 거저 내어줬다.)
- 먼 곳을 바라보는 노모의 모습을 그린 ‘기다림2’가 참 인상적이에요.
“남쪽에 있는 아들을 기다리는 거죠. 통일에 대한 염원을 기다림 자체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이때 백 소장이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랫도리를 벗고 땅바닥에 앉아 우는 꼬마, 시장통에서 국수를 말아먹는 촌부, 거대한 똥더미…. 작품이 마음에 드냐고 묻자 백 소장의 답. “마음에 들다뿐이야. 눈물이 확 쏟아지지. 현상타파라고 있잖아. 우리말로 새뚝이라고 그러거든. 지금 모든 게 미적 질곡에 빠져있어. 아름다움이 고인 물처럼 돼서 썩어버렸어. 그 질곡을 한 사람이 깨뜨리는 걸 새뚝이라고 해. 미적 전환의 계기지. 이 그림들이 그냥 그림이 아니야. 분단이라고 하는, 잘못된 역사라고 하는, 잘못된 예술이라고 하는 거, 그 썩은 질곡을 깨뜨리는 새뚝이란 말이야. 미적 전환의 계기를 제시한 그림이야. 위대한 작가야.” 신 화백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 ‘모내기’ 사건이 올해로 20년째예요.
“그렇죠. 실제 그린 건 87년이고, 사건화된 게 89년이니까.”
- 그리실 당시에 이 작품이 이런 불운을 겪게 되리라는 걸 짐작하셨나요?
“아니요. 실제로 내 의식이 그렇게 돼 있다면 억울하지도 않겠어요. 전혀 의식도 없는데, 의식적으로 그린 게 아닌데 그렇게 되니까 억울하죠.”
그 유명한 ‘모내기’는 국가에 의해 ‘풍성한 수확에 행복해하는 북측 농부들의 모습과 외세를 상징하는 코카콜라, 양담배 등을 바다로 쓸어넣는 남측 농부들의 모습을 대비’한 그림으로 해석되면서 8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당국에 압수됐다. 작가는 3개월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재판절차는 10년이나 계속됐다. 1심과 2심에선 무죄였으나, 99년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불복한 작가가 유엔인권위원회(UNCHR)에 사건을 제소, 한국정부는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구제조치를 취하라는 결의를 받아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어떻게 하다 그런 오해의 발단이 생겨난 걸까요?
“민중미술협회가 해마다 통일염원전을 했어요. 첫해엔 ‘모내기’ 그림을 그리다가 다 못 그려서 작품을 못 냈어요. 그러다가 다음해에 다시 그려서 냈죠. 전시계획 때문에 그리게 된 거고. 통일을 주제로 그리려고 구상을 하는데, 그 당시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통일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껄끄러운 시대였어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을 거다, 통일을 하려면 그 세력들을 쓸어내야 한다. 반통일세력이라고 보면 그 당시엔 군사독재정권이 통일을 제일 싫어하고, 미국이나 일본도 통일이 싫을 것이고, 부자들, 잘 사는 사람들도 세상 뒤집어지는 것 싫어하죠.
또 통일 됐을 때 필요 없는 것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문화라든가 이런 것들도 쓰레기로 쓸어냈죠. 그 다음에 모를 심고, 그 모를 잘 키워서 가을에 추수를 하는데 풍년이 들었어요. 그게 즐거워서 들밥을 먹으면서 웃고 춤추고 하는 것을 통일에 대한 하나의 형瓚막?만들려고 한 거예요.
화면 하단부에서 쓰레기를 쓸어내는 것부터 시작해 추수하기까지의 단계를 점점 올라가면서 그렸죠. 통일 됐을 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법도 없이 사는,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으로 나타내려고 했어요. 그것은 어릴 때 우리 고향, 경북 김천을 생각한 거예요. 보리밭이 파란데 동네 집집마다 살구꽃이 활짝 펴 있고, 그것이 서울로 대학 가서 생각해보니까 하나의 꿈 같고 그랬어요.”
- 그 작품이 이상하게 해석되는 데는 화면구도가 결정적이었잖아요.
“그게 순서대로 밑에서부터 올라가는데 화면 한가운데를 잘라가지고 쓰레기를 쓸어내는 건 남한이고, 추수해서 즐거워하는 위쪽은 북한이래요. 우리 동네 노란 초가집을 그린 건 또 김일성 생가라 이거예요. 또 살구꽃도 (북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진달래라는 거예요. ‘그래, 진달래가 이렇게 크냐’고 따졌더니 그 다음부터 그 얘기는 빼두만. 꽃이 지붕 위까지 올라가니까.(웃음)
법 없이 산다는 건 뭔가 하면 실제적으로 우리 마을에는 서로 이웃끼리 싸워도 재판을 하거나 이런 게 없었어요. 동네사람들이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아예 말을 안 붙이니까 살 수가 없어요. 다른 동네로 이사가야 돼요. 법 아니어도 동네사람들이 인간취급을 안 하니까 쫓겨가는 거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 그런 해석을 처음 접하시곤 어떠셨어요?
“황당했죠. 우습고. 웃기는 얘기다. 근데 걔네들 논리대로 가데요.”
- 유엔 결의 이후 어떻게 됐나요?
“유엔 권고사항이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순 없다더라구요. 그냥 그대로예요.”
- 그럼 이 상태로 그냥 끝나는 거예요? 더 이상 손 쓰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렇죠. 신문에서 하도 떠들고 하니까, 원래 유죄 같은 경우는 압수물을 폐기한대요. 그런데 ‘모내기’는 폐기는 안하고 영구보관하겠다 그러데요.(웃음) 지금 100호 그림이 몇 겹으로 접혀서 봉투에가 넣어져 있어요. 유화인데 말이죠.”
- 보고 싶으시죠? 손 떠난 지 오래된 그림인데.
“보고 싶죠. 이게 캄캄한 봉투 안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요.”
- 구속까지 되셨잖아요.
“구치소까지 갔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죠. 나는 금보석이고, 먼저 구속된 명지대 총학 학생이 있었어요. 얘가 모내기 그림을 부채에 인쇄해 다니다가 구속됐는데, 변호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판사가 직권으로 보석시켜버렸어요.
가 보니 독방도 있고 그렇데요. 그런데 그때 하도 (시국사범들이)많아가지고, 임수경이도 들어가 있고…, 그래서 독방이 없어서 폭력방에를 들어갔어요. 거기 있다 나중에 독방 나왔다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아유, 답답해서 못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원대복귀 했어요. 거기가 훨씬 좋지. 조그만 방에서 축구도 하고….
스물 몇 살 되는 어린 애들이죠. 거기가 훨씬 재미있었어요. 걔들은 아주 단순해요, 솔직하고. 그런 애들은 쪼그만한 죄 지어서 들어와서는 몇 년을 살고 이런데 재벌들이나 국회의원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금방 나와버리니….”
- 그 경험이 이후에 작품 하는 데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든가 작가의식에 악영향 같은 걸 주진 않았나요?
(깊은 한숨) “그게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게 될 거예요. 아니, 하는 것 같애요. 저만이 그런 게 아니고 한국의 모든 작가들, 화가면 화가, 소설가면 소설가, 다 자기검열 한다고. 저항적인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아예 포기해버린 것 아닌가, 그분들이 더 검열을 철저하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민중미술의 퇴조는 이제 자명한 사실로 기록된다. 저마다 첨단과 트렌드를 앞다투는 오늘날의 ‘현대미술’ 시장에서 민중미술은 철 지난 유행가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많은 민중미술가들이 새로운 주제를 찾아 변신한 자리에 그는 아직도 최후의 민중화가처럼 서 있는 듯 보인다.
- 공교롭게도 민중미술이 퇴조했다고 평가하는 시기와 ‘모내기 사건’ 이후가 겹쳐져요. 90년대와 2000년대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민중미술이 현장을 잃어버렸잖아요. 시위문화나 강연, 집회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실제적으로 그림을 보여줄 대상을 잃은 거죠. 이제 일반 대중들과 직접 만나야 되는 상황이 됐어요.
그 문제는 지금도 덜 풀린 게 아닌가 싶은데, 저 같은 경우는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 선보인) ‘갑순이와 갑돌이’라는 작품이 내 나름대로 대중과 직접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있는 사실 그대로 과장 안하고 그림으로써, 욕하려면 욕하고 맘대로 해라, 이런 식이었죠.”
- 민중미술에 대해서 좀 박한 평가도 있어요. 흔히 하는 부정적인 평가가 사회성에 경도돼서 예술성이 부족하다는 건데요.
“그런데 저는 지나간 것은 한 시대의 산물로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봐요. 여태까지 미술사조가 외래적인 것을 그대로 鵝의構?삶과 전연 관계없는 미술이었는데, 민중미술은 우리 삶을 개척하려고 하는, 부딪히고 끊고 나아가려고 하는 현실주의였죠. 전체적인 세계 미술사조와 비교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우리 현실이 그랬고, 그렇게 싸워왔던 게 저는 자랑스럽다고 봐요.”
- 변신이라는 걸 한 작가들도 많잖아요.
“이제 80년대 식으로는 할 수 없잖아요. 변신이라기보다는 현실화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요.”
- 80년대가 그리울 때 있으세요?
“그런 시대가 안 와야죠. 없어야죠. 이젠 많이 좋아졌잖아요.”
- 그래도 작가로서는 그리움이 있을 것 같아요.
“타겟이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 저항하고 비판하고 대항하고 했던 것뿐이죠.”
- 10년 만의 보수정권을 보는 느낌은 어떠세요?
“이게 앞으로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자기 맘대로 못하는 것 같아요. 미국 쇠고기 파동을 보면서 이젠 국민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걸 확실히 느꼈어요. (이명박 대통령을) 찍어준 분들은 굉장히 저력 있게 밀고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아니다 싶으면 이젠 그 사람들이 막는 것 같애. 그래서 지금 보면 우리나라는 잘 돼 가는 것 같아요.”(웃음)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랫동안 교사생활을 하며 네 딸을 비롯한 가족들을 부양했다. 조끼 단추구멍에 칼을 매달고 다니면서 늘상 나뭇가지로 뭘 만들던, 학교 환경미화를 도맡아 하던 시골소년은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미술만이 제 갈 길이라고 여겼다. 그림 구경할 데라곤 이발소밖에 없어서 작가가 된 이후엔 이발소 그림 양식을 작품 곳곳에 차용하기도 했다. 이발소 그림엔 대중들 누구나 공감할 꿈이 묻어있기 때문. 예술가이자 생활인인 그는 꿈과 생활 사이를 어떻게 오갔을까.
- 교직에 오래 계셨는데 어떤 선생님이셨어요?
“87년까지 18년간 학교에 있었어요. 입담이 영 없으니까 좀 인기 없는 선생이었죠. (가수 안치환이 제자라고 갤러리 대표가 귀띔한다.) 그때 안치환은 쪼그매가지고 까불까불 하고 다녔어요. 요샌 ‘민중’자 붙여서 무게 잡고 딱 다니는데, 하하하. 굉장히 밝았어요. 얼마 전에 신문 보고 전화 왔더라구요. 전시 보고 점심 사겠다고. 학생들한텐 늘 미안해요.
먹고 살아야 되니까 선생을 했는데, 그림 그리느라 전력투구가 안 됐으니까. 그래서 전업작가를 한다고 그만뒀는데, 그 이듬해인가 모내기 사건이 났죠. 조금 그려볼까 했는데 그렇게 된 거예요.”
- 자제분은 어떻게 두셨어요?
“딸만 넷이에요. 셋은 출가했고 막내는 나이차가 좀 나요. 셋째랑 8년차니까.”
- 설마 아들 낳으시려고 그러신 거세요?
“네. 제가 외아들인데 어머니가 동네방네 돌아다니시면서 맨날 아들 못 낳은 한탄을 하고 그러니까. 그게 우리 마누라 귀에 들어간 모양이야. 그래서 한번 더 시도를 했는데 또 딸이에요. 지금은 딸이 아주 좋아요.”
- 어떤 아버지셨어요?
“권위 없는 아버지였죠. 은행 갈 줄도 모르고,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 하나 뗄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마누라가 다 했어요.”
- 연애결혼 하셨어요?
“에이! 난 (연애)못해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못했어요. 그냥 중매로. 같은 학교 다닌 고향 사람이에요. 김천에 있는 성의고등학교라고 교장은 한 명인데 남자부, 여자부가 있었어요. 여자부 후배죠. 이종사촌 형님이 그 학교 교사셨는데, 남자 학교에 있다가 여자 학교로도 가고 그랬어요. 나도 가르쳤다가 우리 마누라도 가르쳐서 소개한 거예요.”
_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 “파킨슨증후군이라고 희귀병이에요. 오래됐어요.”
- 직접 병수발을 다 하신다면서요?
“아무도 없으니까 제가 다 해야죠. 파킨슨병 같은 경우는 병세가 진전이 안 되는 약물이 개발돼 있는데, 파킨슨증후군은 특별히 약이 개발된 게 없어요. 증상도 여러가지고, 진전도 빨라요. 자꾸 쓰러지고 그러는 게 그 전부터 진행이 돼 왔던 것 같은데 진단을 받은 건 82년이에요. 그걸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 ‘갑순이와 갑돌이’를 걸 때까지도 나한테 얘기를 안 했어요. 그림 다 걸고 나니까 그제서야 얘기하더라구요.”
_아픈 사람도 힘들지만 옆에서 간호하는 사람도 지치고 힘든데, 선생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이젠 뭐 그게 생활이 돼 있으니까. 처음에는 가슴도 답답하고 숨막히고 그랬는데, 이젠 그냥 생활처럼 되니까…. 어떨 땐 상태가 더 심할 때도 있고, 어떨 땐 좀 좋을 때도 있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그 정도예요. 병원은 성질에 안 맞아서 못 있고, 좀 심할 때를 빼곤 집에 누워 있죠.”
- 참 대단하세요. 굉장히 사랑이 깊으신가봐요.
“에이, 어찌할 수 없으니까 하는 거죠.(웃음) 현재 집안형편도 그렇지만, 이 핑계로 요새 아주 나 그림 못 그린다, 앞으로 뭐 할 거냐 물으면 그 핑계로 덮어버리죠.”
-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스트레스 받아요. 뭔가 하면은, 내가 해왔던 그 수준을 계속 유지해야 되니까…. 요새는 그림에 대한 생각을 못하는 편이에요. 제 사정도 있고, 그냥 그런 유보상태예요. 집안문제라든가 이런 게 풀리기 전엔 아예 쉬려고 해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을 제외하곤 바깥 나들이가 어려운 그와는 일요일 한 시간의 인터뷰가 약속돼 있었다. 한 시간이 넘어가자 그의 마음이 바빠졌다. 백기완 소장이 막걸리 한 잔 하자고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그가 아내 간병을 위해 바쁘게 팔을 흔들며 달려나갈 때 그 손끝에 유달리 눈길이 갔다. 언젠가 예전처럼 다시 신명나게 그림을 그려야 할 손이다. 그는 손사래를 치겠지만 아직 시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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