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협화음 1318들 마음의 벽을 헐고 '하모니'를 외치다
아이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원했다. 하나 가난과 소외라는 현실의 벽은 그들의 외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을 향해 외마디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메아리로 돌아온 외침은 아이들 가슴 속에 시퍼런 멍자국만 남겼다. ‘하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관심도, 세상이 주는 시선도 부담스러워 하며 그렇게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러던 어느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흥얼거리던 노래에서 한 줄기 희망을 봤다. 그리고 자신들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래를 통해 상처 입은 기억과 화해하며 마침내 세상이라는 무대에 당당히 선 아이들. SK텔레콤 ‘1318 해피존’이 운영하는 전남 곡성군 ‘MC용의 막 나가는 노래교실’ 멤버들이다.
지금은 폐교가 된 옛 곡성중앙초교의 단층 건물을 개조한 ‘1318 해피존-웃음滿땅’에서는 매일 방과 후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쳐 외쳐봐요~ 아무도 없을 때 기댈 수 있는 곳. 마음을 열어봐요~ 행복이 언제나 찾아오는 곳~” 노래교실을 이끌고 있는 김용운(28) 교사의 허스키한 음색에 남녀 중ㆍ고생 12명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 때만큼은 평소 말수가 적고 소극적이던 진영(14ㆍ여)이도 환한 미소로 한껏 목청을 돋운다.
식당 일을 하는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진영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친구들의 따돌림이 두려워 자기보다 어린 초등학생하고만 어울리던 외톨이였다. 동료들의 차가운 눈길과 야멸친 행동에 수없이 상처를 입었지만, 털어놓을 곳이 없어 삶이 버겁기만 했다.
세상에는 어둠만이 존재한다고, 아니 세상은 어둠 그 자체라고 느꼈을 때, 그래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진영이의 두 손을 잡아준 게 바로 ‘1318 해피존’이다.
이 곳은 13~18세 소외계층 청소년들의 자립과 자아 실현을 돕기 위해 SK텔레콤과 부스러기사랑나눔회가 2006년 말부터 구축해온 지역 아동센터. 김 교사는 “진영이가 노래를 시작하면서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뀌었고 ‘왕따’도 극복했다”며 “음반도 나올 예정이어서 지금은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고 전했다.
곡성 ‘1318 해피존’에 노래교실이 문을 연 것은 지난해 2월. 하지만 진영이처럼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아이들을 껴안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김 교사가 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겠다며 <꼴지를 위하여> , <아름다운 세상> 등 노랫말이 좋은 곡들만 고른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그런 노래 부르면 우리 처지가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는 거 모르세요? 그리고 노래만 부를 거면 차라리 노래방에 가는 게 낫지요. 우리 마음도 모르면서….” 아름다운> 꼴지를>
노래교실 운영 한 달 만에 참가 청소년들이 20여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상처 입은 아이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부터 열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보컬 트레이닝. 김 교사는 학창시절 밴드 활동을 했던 경험을 살려 오디션으로 뽑은 아이들에게 발성법과 테크닉, 모창, 자기 목소리 찾기 등을 가르쳤다. “노래교실이 가수 지망생 키우는 곳이냐”며 외면할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이는 기우였다.
“나 같은 음치도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어요”(김은률ㆍ18)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김정관ㆍ18)
아이들은 가슴 설레 하며 조금씩 웃음과 자신감을 되찾았고, 늘 굳게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마음의 문도 열기 시작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이해심도 생겼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했던 휘향(16ㆍ여)이는 노래를 시작하면서 원망의 대상이던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도 배웠다. “저마다 다른 음색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불협화음의 연속이죠. 이를 줄이려면 각자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노래 소절을 맡는 게 중요해요. 물론 의견 충돌도 있지만, 결국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최고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성격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도 생긴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신감을 되찾은 아이들은 공부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워낙 좋아한다는 고교 1학년 별이(16ㆍ여)는 지난해 노래교실 문을 두드린 이후 학교 성적이 부쩍 좋아졌다. “노래를 배우면서 학교생활이 즐거워졌어요.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던 성격도 바뀌었고요. 무엇보다 노래교실 때문에 성적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주변에선 저보고 ‘이제야 사람 됐다’고 해요. 하하하.”
노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된 아이들은 이제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5일 곡성군민회관 소강당에서 콘서트를 열고 그들의 꿈과 희망을 노래했는가 하면, 앞서 3월부터 섬진강 기차마을 내 ‘콩세알 문화공간’에서 정기 공연을 갖고 있다. 아이들은 또 여성 듀엣 ‘구성진 목소리’와 남성 그룹 ‘EM’을 결성, 내달부터 곡성지역 노인회관과 마을회관을 돌며 불우 어린이와 노인들을 위한 ‘노래봉사’에 나설 계획이다.
“우리는 노래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감과 사랑이라는 큰 자산을 얻었어요. 이제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어요. 매일 우리끼리만 노래 부르면 재미 없잖아요.”
최근 전국 29개 ‘1318 해피존’ 대상의 ‘해피송’ 공모에서 대상을 받아 생애 처음 음반녹음 작업을 앞둔 아이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우리 노래를 듣고 우리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애들아!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 함께 세상을 향해 한발씩 내딛자꾸나.”
곡성=안경호기자 khan@hk.co.kr
■ SKT '1318 해피존'/ 하루 5시간도 훌쩍 '또 하나의 가정'
'1318 해피존'은 SK텔레콤이 2006년 말 13~18세 소외계층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사회복지 지원센터. 주로 초등학생 대상인 지역 아동센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초 생활을 위한 생계 도움 및 자아 계발을 위한 교육 등 지원 프로그램을 차별화했다. 현재 서울, 경기, 강원, 전북, 충남, 제주 등 전국에 29개소의 '1318 해피존'이 마련돼 있다.
이 곳에선 주로 방과후 학습 및 급식, 청소년 문제 상담, 가정 방문을 통한 상담 및 문화활동 등을 지원한다. 주말에는 '들살이'라는 이름으로 캠핑 등 야외 활동도 한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사 및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129명의 상근 교사들이 근무 중이며, 음악 체육 등 청소년들의 문화활동을 위한 전문 교사 375명과 자원봉사자 961명이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1318 해피존'을 거쳐간 청소년은 모두 1,600여명. 결손 가정이나 소외계층 자녀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1318 해피존'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방과후 학습을 하거나 문화활동 등을 통해 친구를 사귀며 힘든 환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이곳을 가리켜 '사회적 가정'이라는 표현을 쓴다. 신유환 SK텔레콤 사회공헌팀 매니저는 "해피존 이용 청소년의 80% 이상이 결손 가정이나 소외계층 출신"이라며 "전체 이용자의 71%가 하루 5시간 이상 해피존 공간에 머문다"고 소개했다.
SK텔레콤이 '1318 해피존'을 지원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정부의 청소년 지원대책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신 매니저는 "교사 인건비, 운영비 등을 감안하면 '1318 해피존' 사업은 한없이 비용이 들어가는 구조"라며 "기업이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는 만큼, 기업이 단초를 제공하고 정부가 청소년 지원을 위한 입법 등 정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보건복지가족부는 올해 아동복지사업 안내 자료에 '1318 해피존'을 성공 사례로 소개했다.
곡성=손용석 기자 stones@hk.co.kr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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