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이 찾아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던 3월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경기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은 식구가 한명 줄어 7명이 됐다. 일본군에게 끌려가 2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던 문필기(82) 할머니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문 할머니는 지난해 병상에서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영상 증언에 나설 만큼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는 데 열심이었던 분이라 할머니의 죽음은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그렇게 문 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 두 달 후인 지난 5일, 이옥재(42)씨가 ‘나눔의 집’을 찾았다. 경기 하남시 신장동에서 80여평 규모의 화원을 운영하는 그는 8년 전부터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 ‘꽃 봉사’를 하고 있다. 이날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30평 남짓한 앞 뜰에 야생화 ‘하늘매발톱’ 100여주를 심었다.
이씨는 “매의 발톱을 쏙 빼닮은 이 보랏빛 꽃은 질긴 생명력이 특징”이라며 “할머니들이 건강하게 장수하시라는 뜻에서 골랐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게 당한 역사적 수모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도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이씨가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0년 봄. 봉고차를 타고 나들이 나온 할머니들이 우연히 그의 화원에 들렀다. 이씨는 할머니들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됐고, 평생동안 할머니들을 모시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할머니들을 만나고 일주일 뒤 이씨는 ‘군자란’ 화분 12개를 들고 퇴촌면 사무소에서부터 12㎞나 이어진 비포장 길을 달려 나눔의 집을 찾았다. 이후 8년 동안 ‘나눔의 집’ 뜰에는 봄에는 팬지, 꽃잔디, 데이지 등이 꽃을 피웠고, 가을에는 대국화가 손님들을 맞았다. 그동안 12명이었던 할머니가 7명으로 줄었지만, 할머니 방에도 두 달 간격으로 화분이 바뀌었다.
8년간 은행나무, 소나무 등 나무 40여 그루도 뿌리를 내렸다. 나눔의 집을 장식한 꽃나무와 화분은 각각 800여주와 480여개에 달한다. 이옥선(85) 할머니는 “저 이가 오기 전에는 꽃이 하나도 없었다”며 팬지와 철쭉이 핀 정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한 가족처럼 살가운 사이지만, 할머니들이 처음부터 이씨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말씀도 안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는데, 3~4년 꾸준히 찾아오니 할머니들이 그제서야 곁을 주셨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 여름에는 아예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할머니 네 분을 모시고, 경상북도 밀양과 상주 등 할머니들의 고향을 찾아가기도 했다.
주말마다 할머니들을 챙기는 이씨의 선행은 평일에도 쉬지 않는다. 자신의 화원이 있는 신장동 일대의 독거노인 40명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전달하고, 정신지체 장애인 4명이 시내에 나갈 때는 화원에서 사용하는 6인승 배달차를 제공한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봉사하다 보니, 가정은 자연스레 뒷전이 됐다. 그가 ‘나눔의 집’을 찾기 시작할 때는 부인(40)과 쌍둥이 아들ㆍ딸(14)은 남편과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야속한 마음에 부인은 “차라리 할머니들과 함께 살지 그러냐”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모두 남편과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느덧 중학교 2학년으로 자란 쌍둥이들은 주말마다 친구들을 데리고 아빠와 함께 ‘나눔의 집’에 꽃을 심으러 올 정도다. 이씨는 “아직도 겉으로는 툴툴대지만, 아내의 숨은 지원이 없었으면 주말마다 봉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다음 목표는 올해 광복절에 하남 시민들을 모아 ‘나눔의 집’ 후원회를 발족시키는 것이다. 이씨는 “거의 성사단계인데, 회원 한 사람이 매월 1만원씩 후원금을 내고 할머니들을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눔의 집’ 살림을 돌보는 안신권 국장은 “이 곳은 한 달 운영비가 1,100만원 가량 필요한데, 정부지원금을 빼면 200만~300만원이 부족해 대부분 후원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며 “이씨가 이제는 후원회까지 만들어 도와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기뻐했다.
이씨는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공식 사과할 때까지 할머니들이 오래 살아계셔서 평생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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