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기업에서 홍보업무를 맡길 업체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한 PR에이전시(홍보대행사) A사. 해당 대기업 제품의 특성에 맞춘 홍보기획 제안서를 만들어 입찰에 나섰다. 결과는 낙방.
그러나 기획아이디어가 좋지 않아 떨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한 것은 한순간. 응모했던 홍보대행사 중에 선택된 곳은 한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그 대기업은 A사가 아이디어로 제출했던 기획제안서 내용과 똑 같은 홍보이벤트를 개최한 것이 아닌가. 누가 보더라도 ‘아이디어 훔치기’ 였다. A사 관계자는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으면 업계에서 우리 회사 입지만 좁아질 수 있어, 해당 업체에 불만을 제기하는 선에서 끝냈다”고 허탈해 했다.
이 같은 사례는 PR에이전시 업계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홍보대행사 B사 관계자는 “홍보 대행사 공모를 해놓고 뽑지 않은 사례가 많다”며 “떨어뜨려놓고 우리가 냈던 똑 같은 아이디어로 홍보를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많이 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들이 이 같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 구제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피해를 입은 기업이 소송을 제기해 법원에서 민사상으로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 소송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송으로 갈 경우, 몇 년이 걸릴 수 있고 중소기업으로서는 소송비용이 버거울 뿐만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거래관계가 끊기는 등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련 법규가 없어 공정거래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공정위의 감시 대상이 되는) 하도급 거래라고 보기도 어렵고 시장의 특성상 해당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입증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며 “소송을 낸뒤 피해액을 책정해 손해배상을 받는 방법이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도용 당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더라도, 새로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공정위가 제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기업의 벤처기업 기술력 빼내기도 보호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최근 벤처기업 N사는 ‘거래관계에 있던 대기업 K사가 인터넷 관련 기술을 빼내간 뒤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며 공정위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공정위는 계약의 일방적인 파기가 있었는지 여부만 판단할 수 있었을 뿐, 기술 빼내기에 대해서는 피해업체가 법원에 별도로 소송을 내야만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나 기술 훔치기가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불공정 혐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공정거래법 법령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공정위로서도 난감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중소기업청은 대기업들이 납품 중소기업에게 기술자료를 부당하게 요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기술자료 예치제(에스크로)’를 도입, 중소기업의 핵심기술을 제3의 기관에 예치하고 원하는 대기업이 열람만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중소기업 아이디어ㆍ기술 도용에 대한 실질적인 제재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의 횡포를 뻔히 알면서도 손쓰지 못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커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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