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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2> 바람벽-허깨비가 노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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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2> 바람벽-허깨비가 노는 스크린

입력
2008.05.13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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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는 바람벽이라는 말에 익숙지 않은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이 말의 이미지를 실제보다 훨씬 을씨년스레 새겨놓을 것이다.

시의 화자는 객지의 여인숙 방에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듯하다. 여인숙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사는 이다(시적 자아가 늘 시인 자신의 것이랄 순 없겠으나, 이 시를 발표한 1941년 백석은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지금의 長春]에서 측량보조원 노릇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객수(客愁)에 지친 화자에게, "희미한 오십촉(五十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있는 그 흰 바람벽은 그리운 것들이 비치는 영사막이다.

거기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그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그 바람벽-영사막엔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화자가 사랑하는 그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흰 바람벽 위에서, 지난 일의 회상(어머니)과 앞으로 올 일의 공상(가능세계 속의 아내와 아이)이 어우러져 춤춘다. 그 춤사위는 아련하고 애틋하다. 화자는 떠돌이 생활의 추위와 정(情)주림을 그림자놀이로 달랜다. 그 환영이 펼쳐지는 곳이 흰 바람벽이다. 화자는 그 바람벽-스크린 위에서 "하눌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된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쓸쓸한 자부심에 위로받으며, 화자는 비로소 스러지는 환영과 함께 잠들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석 詩 '흰 바람벽이 있어'는 주변인 노래

<흰 바람벽이 있어> 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자의 노래다. 그리고 주변인의 노래가 일쑤 그렇듯, 깊다란 공감을 자아낸다. 사람들 태반은, 특히 시라는 형식의 노래를 읽는 사람들은 십상팔구, 주변인이게 마련이니. 백석은 세는 나이로 서른 살에 이 시를 썼다. 요즘으로 치면 푸른 나이지만, 그 때로선 제 삶에서 패배의 조짐을 읽기에 넉넉한 나이였을 것이다. 물론 백석은 문학사에선 패하지 않았다.

<흰 바람벽이 있어> 에서 바람벽은 객지의 세찬 바람을 막아내며 화자를 몽환으로 이끄는 벽이다. 그 바람벽 위의 환영을 통해 화자의 가난과 외로움은 발연히 고귀함의 징표로 변한다. 이런 관념의 놀이를 통해서만, 화자는 현실의 추레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기실, 바람벽은 바람을 막는 벽이라는 뜻이 아니다. 바람벽은 그저 벽이라는 뜻이다. 중세한국어로 '바람'은 벽을 뜻했다. 예컨대 <훈몽자회> 는 壁(벽)의 새김을 '바람'이라 적고 있다. 그러니까 바람벽은 '벽벽'이자 '바람바람'인 셈이다.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한 겹침말이라 할 수 있다. 새김과 소리의 순서를 뒤바꾸긴 했지만, '족발'이라는 말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현대한국어 '바람'과 마찬가지로, 중세한국어 '바람' 역시 바람(風)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중세한국어에서 바람은 風과 壁의 뜻을 함께 지닌 동음이의어였다. 혹시, 바람(風)을 막는 구실을 한다 해서 벽을 바람(壁)이라 부르게 된 건 아닐까? 그리 넘겨짚을 수야 있겠지만, 확증은 없다. 만약에 그랬다면, 다시 말해 중세한국인들이 風과 壁의 의미연관을 또렷이 의식하고 있었다면, 그 땐 바람을 동음이의어(homonym)가 아니라 다의어(polyseme)라 해야겠다.

동음이의(homonymy)는 이질적 의미들이 우연히 한 형태에 스며든 경우를 가리키고, 다의(polysemy)는 첫 의미가 가지를 쳐나가며 여러 의미로 번지게 된 경우를 가리킨다. 그래서 동음이의어는, 겉보기에 형태가 하나지만, 기실 여러 개의 서로 다른 기호들이다. 반면에 다의어는, 어원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만큼, 그 본질이 한 개의 기호다.

여인숙의 얇은 벽, 방음안돼 잠 훼방놓기도

여인숙의 바람벽은 흔히 얇다. 방음이 될 만큼 두터운 바람벽을 지닌 건물들은 최근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인숙 방에선, 듣지 않으려 해도 옆방 소리가 들려온다.

혼자 여인숙엘 들었는데 옆방에 젊은 남녀(동성 커플이라 해도 좋다)라도 투숙해 있다면, 쉽게 잠을 이루기 어려우리라. 칸막이에 지나지 않는 얇은 바람벽을 타고 와, 사랑의 소리가 신경을 얼크러뜨리기 일쑤일 테니.

여인숙의 얇은 바람벽을 생각하면 이내 걀으4?노래가 폴 사이먼의 <덩컨> 이다. 모텔 방에 든 화자는, 바닷가에서의 권태로운 유년기와 뉴잉글랜드에서의 가난한 청년기를 회상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옆방의 커플은/ 틀림없이 상을 탈 거야/ 밤새 그 짓을 하고 있으니// 어쨌든 난 잠을 자려 애써 보지만/ 이 모텔의 바람벽은 싸구려거든/ 링컨 덩컨이 내 이름이야/ 지금부터 내 노래를 들려줄게."

폴 사이먼은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가수다. 아트 가펑클과 함께 불러 영화 <졸업> 에 끼워넣은 <로빈슨 부인> <스카보로 시장> <침묵의 소리> 같은 노래들에 특히 반했지만, 그가 혼자 부른 <덩컨> 이나 <복서> 같은 노래도 오랜 세월 내 감상주의를(그래서 더러 누선을) 자극했다. <덩컨> 은 요새도 자주 듣는다.

선율 못지않게 가사가 발랄하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부르는 랩송들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나란히 견주기가 어렵지만, 1960~70년대 한국 가요들은 선율에 앞서 가사의 됨됨이부터 서양 대중가요들에 뒤졌던 것 같다. 정치의식 얘기가 아니다. 사랑 타령에도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기.

바람벽을 통해 링컨 덩컨에게 들려온 소리는 잠을 훼방놓는 데 그쳤지만, 그 소리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는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부제의 단편 <바람벽> 에서 바로 그 얘기를 들려준다.

로맹 가리 소설, 바람벽이 상심의 자살 불러

런던의 세밑, 어느 희뿌연 새벽. 누추한 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던 한 남학생이 자살한다. 나이는 스무 살쯤. 그에겐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신경질적인 필체로 쓴 유서에 따르면, 그는 외로움의 발작에 꺾이고 말았다. 왜? 어느 밤, 외로움에 맞서 싸우고 있는 그의 귀에, 바람벽을 통해서 옆방 여자의 낮은 신음과 침대의 삐걱거림 소리가 들려왔던 것.

그는 옆방의 '천사 같은 처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수줍어서 말도 못 붙이긴 했지만. 그러니, 그녀의 '음란한' 신음소리가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만도 했다.

청년은 분노와 환멸에 몸을 떨며 그 소리들로부터 벗어나려 애썼지만, 쾌락의 헐떡임과 침대의 삐걱거림이 한 시간 너머 들려오자, '구역질날 만큼 추잡한 세상'과 헤어지기로 결단한다. 그리고는 커튼 줄을 잡아당겨 제 목에 감는다. 얇은 바람벽이 섬약한 청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현장에서 철수하려던 런던 경찰국 소속 법의학자는 호기심으로 바람벽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방 커플은 진즉 사랑놀이를 끝내고 기분 좋은 잠에 빠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지막한 신음으로 이런 비극을 불러온 '천사 같은 여자'를 그는 한 번 보고 싶었고, 그래서 그 방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마침내 주인 여자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서 놀라운 진상이 밝혀진다.

바람벽을 건너와 자신을 절망으로 몰고 간 신음소리의 정체를 청년은 완전히 오해했다. 법의학자는, 그 방에서, 음독자살한 것이 분명한 금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마지막 고통이 길고 끔찍했으리라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탁자 위에 놓인 유서에, 그녀는 제 자살 동기를 외로움이라 적어놓았다. 그러니까 그 건물의 얄팍한 바람벽은 오해의 메신저였던 것이다. 그 바람벽만 아니었다면, 두 젊은이는 연인이 돼 행복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람벽은 칸살을 지름으로써, 내부와 외부를 가름으로써 사적 공간을, 사랑의 공간을 만든다. 백석에게 그 바람벽은 그리운 허깨비들이 노니는 만화경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바람벽은 사랑의 헤살꾼이자 오해의 분만실이다. 바람벽이 사랑의 말이라면, 때로 그 사랑은 엇나간 사랑, 슬픈 사랑일 것이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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