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 상태인 환자가 연명(延命)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존엄사’(尊嚴死)를 허용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이 국내 최초로 제기돼 안락사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뇌사 상태에 빠진 김모(75ㆍ여)씨와 자녀 4명은 9일 병원을 상대로 ‘무의미한 연명행위 중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서부지법에 냈다.
이들은 가처분 신청을 통해 병원 측에 ▦인공호흡기 적용, 약물 투여, 영양 수분 공급 등 일체의 연명치료 금지 ▦환자 김씨의 심장이 정지하는 경우 응급 심폐소생술 금지 ▦자녀들의 연명치료 중단 요구 거절 및 방해 금지 등을 요구했다.
김씨 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울의 백경희 변호사는 “준(準) 뇌사 상태인 환자는 뇌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라며 “가처분 신청은 환자가 연명만 하는 치료를 받지 않은 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현호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안락사를 인정한 판례들이 많다”며 “그 동안 꾸준히 논란이 제기된 ‘소극적 안락사’(존엄사)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씨의 가족들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연장하는 것은 김씨의 평소 언행에 반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서에 따르면 김씨는 2005년 남편이 장기간 입원한 병원에서 기관 절개를 통한 치료를 하자고 제안했을 당시 “곱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며 남편의 수술을 반대했다. 김씨는 또 발병 전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호흡기는 절대 끼우지 말라. 소생하기 힘들 때 억지로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2월 16일 개인병원에서 폐렴 의심 진단을 받고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씨는 기관지내시경 검사 중 조직혈관 내 과다 출혈로 10분간 심장이 정지하면서 저산소성 뇌 손상 증세에 의한 무의식 상태에 빠졌으며, 현재 뇌사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의료계는 존엄사를 안락사와 구별해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률이 없어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뇌사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는 소극적 안락사(존엄사) 행위는 살인죄로 처벌받았고 법원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퇴원을 요구한 뇌출혈 환자 가족과 퇴원을 허락해 환자를 숨지게 한 의사를 기소한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2004년 이들에게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지난 1월에는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아들을 숨지게 한 아버지에게 살인죄가 적용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안락사 문제는 국민적 합의를 거쳐 입법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현 상태에서 법원이 안락사를 허용할 가능성은 없다는 이야기다.
● 존엄사(尊嚴死)
뇌사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는 등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행위. 고통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안락사(euthanasia)의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약물투여 등 인위적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의미의 안락사와 소생 가능성이 적은 환자를 방치해 사망토록 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구별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 일부 국가가 존엄사뿐 아니라 안락사까지 인정하는 특별법을 시행 중이나 우리나라는 둘 다 허용하지 않고 있다. 가족의 요청이 있어도 뇌사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면 살인죄가 적용된다.
이태무 기자 김정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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