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한 지 3개월도 안 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벌써 30% 아래다. 민주화 이후 어느 대통령도 겪지 않은 급속한 민심 이탈이자 지도력의 동요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기록한 민주화 후 최고 득표율이 신기루같다.
누구보다 이 대통령 스스로의 고뇌가 클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당 후보경선 주자거나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국민의 기대가 식어 지도자의 지도력이 흔들리면 결국 사회와 나라의 앞날이 흔들린다. 그래서 심각하다. 이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는 나라와 국민의 장래가 불안하다.
그런데 서둘러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늪 속으로 빠져들듯, 지금 이 대통령이 마주한 지도력의 위기 또한 단숨에 벗어날 길을 찾기는 어렵다. 현재의 위기가 국민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데 따른 ‘신뢰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믿고 따라주는 국민이 적어져 말 한 마디, 발 한 걸음이 힘을 갖기 어려운 처지가 이만저만 답답하지 않겠지만, 무너진 믿음의 회복은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듯 인내와 성의를 다하는 길밖에 없다. 다만 다시 쌓아 올린 믿음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와 기초공사에 충분히 공을 들여야 한다.
MB가 맞은 '신뢰의 위기'
믿음은 인간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가치다. 동양전통의 오행사상은 동서남북을 각각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에 맞추면서 중심ㆍ중앙을 신(信)에 대응시켰다. 색깔로는 노랑색(黃), 음으로는 궁(宮)이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릴 때 노랑색으로 밑그림을 그렸던 일, 궁이 서양의 C나 도처럼 기본음, 으뜸음이라고 배웠던 게 새롭다.
<논어> 는 ‘신의 없이 백성이 있을 수 없다’(民無信不立)고 사회의 기초가 신의임을 갈파했다.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계약론’이 사회와 국가의 성립 근거를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집단계약에서 찾으면서 기본전제로 본 것이 ‘신의ㆍ성실’이었다. 논어>
경제의 혈액인 화폐도 믿음의 결과물이다. 특히 금은과의 태환이 보증되지도 않는 지폐가 가치 척도, 지불 수단, 가치 저장 수단으로 폭넓게 기능하는 것은 ‘상호신뢰’를 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실시된 사상 최초의 관리통화 실험은 신뢰가 종이쪽과 지폐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임을 일깨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는 ‘종이로 돈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프랑스에서 실현했다. 루이 14세 타계 직후 프랑스는 막대한 국가채무에 시달렸다. 당시 유럽 왕들은 실물가치가 액면가와 같게 발행되던 금은화에 들어가는 금은의 양을 줄여 화폐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채무를 처리했다. 종이로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편했다.
로가 발행한 왕립은행권은 채권과 다를 바 없었지만 금은화와의 태환을 보증, 액면가의 80%나 할인돼 거래되던 국채와 달리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로는 보증용 금은의 양을 크게 넘는 은행권을 발행했지만 문제가 없었다. 종이쪼가리가 일단 신뢰를 얻으면 태환할 금은 없이도 충분히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음이 입증됐다.
그러나 왕세자가 마차 세 대 분의 지폐를 금은으로 바꾼 후 모든 지폐의 태환이 동시에 요구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심이 퍼지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태환 요구에 견디다 못한 로가 태환을 정지하는 순간 왕립은행은 붕괴하고, 인류 최초의 지폐도 휴지가 됐다.
정직과 실행으로 극복해야
‘상호신뢰’는 정치에서도 기둥역할을 한다. ‘나의 한 표가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이 없다면 민주주의 정치는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이 거대한 집단 환상이더라도 단단하게 응집돼 세상을 떠받친다. 그러니 이 대통령은 민심이 바람 앞의 갈대같다고 속상해 하기보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이 어긋남이 없었는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
<예기> 는 ‘큰 믿음은 약속에 있는 게 아니다(大信不約)’고 일렀다. 지도자가 말없이 행동으로 보이고, 일단 말했으면 정확히 지키고,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정직하게 인정하면 국민의 큰 믿음은 따르게 마련이다. 예기>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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