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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스승' 모진 세파 속에 더 푸르렀던 참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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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스승' 모진 세파 속에 더 푸르렀던 참스승들

입력
2008.05.13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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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ㆍ소재영 엮음/논형 발행ㆍ428쪽ㆍ1만4,000원

광우병 논란에 나라가 흔들거린다. 국회에서 치고 받으면, 한밤중의 도심에서는 10대 여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 죽기 싫다”며 울먹인다.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연예인들까지 나서 질세라 자못 비장하게 한마디씩 거든다. 한미 FTA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갑론을박은 시쳇말로 국격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사회에 도대체 준거(reference)틀이 없다. “이 더운 날 정말 짜증나게 한다”는 어느 네티즌의 말은 참 스승 혹은 진짜 어른이 없는 오늘의 시류에 대한, 차라리 솔직한, 즉물적 반응이다. 바람 잘 날 없는 나라에서 우리의 얼을 굳건히 지켜온 27명의 선각자들이 강퍅한 디지털 문명의 세파를 뚫고 올라왔다.

이제는 육순을 넘은 그들의 마지막 직계 제자들이 각각의 스승을 불러내 피와 살을 입혔다. 그것은 곧 수상쩍은 세월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스승의 모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이기도, 모진 세파속에서도 더욱 푸르렀던 국학자들의 혼을 되살려 내는 일이기도 하다.

“기계 정보화와 우리 말의 세계화를 내다보는 밝은 눈으로 1957년 한극 타자기 자판의 합리적 통일 위원회를 구성하셨다.” 외솔 최현배를 사사하고 현재 외솔회 회장으로 있는 김석득(77)씨가 외솔의 고갱이를 건져 올린다. ‘자칭 타칭 인간 국보 제 1호’ 양주동 선생을 제자 김태준(69) 동국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요약한다. “25살에 평양숭실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가 된 이래로 무당이 대를 잡은 것 같은 신바람으로 교단을 지켰다.” 그는 “대학에서 이 천재 문학자를 은사로 만나게 된 이래 천재일우의 인연으로, 겁 없이 문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에 몸을 맡겼다”며 감사의 말을 대신한다.

김병민(57) 옌볜대 총장의 글은 옅어져 가는 스승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 준다. 말기의 결장암에 걸렸으면서도 자신의 건강보다 제자의 박사 학위 논문 심의에 참석하지 못 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하던 은사 정관룡 교수를 그는 이 시대 한국인들에게 들려준다. 명성을 듣고 한국에서 와서 배우고 간 제자들에게는 편치 못한 몸 상태에도 불구, 수시로 한국에 전화를 걸어 논문 수정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백과사전> 제작을 지휘하는 등 조선족 문화를 위해 스승이 타계 직전까지 애썼던 모습도 되살려 낸다.

책에는 이 밖에 전통 유학과 불교 교육을 통해 입신한 승려이며 당대의 지식인이던 석전 박한영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학문적 거두들을 기억하는 제자들의 곡진한 마음이 가득하다. 대학 시절 가람 이병기 선생을 사사했던 최승범(77) 전북대 명예교수는 담배를 멀리 하되 술은 평생토록 즐겼던 스승을 사철 푸른 난의 기품에 비유한다.

정양완(79) 전 한국정신문화원 교수는 창씨개명 때 절개를 꺾던 문인들을 꾸짖으며 선비의 기품을 보인 위당 정인보의 기개를 복원시킨다. 이 밖에 권재일(55)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한글학자 주시경을, 신동욱(76) 전 연세대 교수는 만해 한용운을, 독립기념관 박걸순(49) 학예실장은 단재 신채호에게 21세기의 볕을 쏘인다.

“술을 한창 마셔야 할 시간에 술이 깨니 낮술은 안 한다”는 애주가이자 소설가 황순원의 인간적인 모습을 제자인 소설가 전상국(68)씨가 회고한다. 그의 입담에 취해 있다 보면 왜 “황순원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는 진정한 문학가”인지가 자명해 진다.

책의 탄생은 지난해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형 출판사에 김태준, 소재영(75ㆍ숭실대 명예교수)씨가 출판을 먼저 제의해 왔다. “근대 격변기의 진정한 스승들을 마지막 제자들의 소리로 올곧게 살려내자”는 것.

그러나 직계 제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는 데 초점을 맞춘 만큼, 필진 선정이 만만찮았다. “납북된 천태산인의 경우는 아무리 찾아도 제자가 없고, 원고를 쓰기로 한 제자가 개인 사정으로 부득불 빠져야 했어요.” 출판사 소재두 대표가 독립선언서 초안자의 수(33인)에 맞추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어야 했던 까닭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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