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박경리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난 며칠을 보냈다. 한 소설가를 잃은 아쉬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실 수 있다니, 새삼 선생님의 큰 삶을 바라보게 된다.
5월 5일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참으로 아름다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빛나고, 바람은 싱그러웠다. 초여름 꽃들과 신록이 눈부셨다. 빈소에서 슬퍼하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면 한결같이 “참 좋은 계절에 돌아가셨구나”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선생님을 좋아했고, 선생님의 병세가 하루하루 깊어지는 것을 멀리서도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선생님이 돌아가시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원주의 토지문화관 선생님의 텃밭에 고추 가지 오이 상추 등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 뒷산의 취나물이 선생님을 기다리다 억세졌겠다는 생각, 창작실에 머무는 작가들은 올해 봄나물을 제대로 못 먹었겠다는 생각 등이 두서없이 오갈 뿐이다.
흙과 물과 나무 짐승들의 어머니
선생님은 어린이날 돌아가셨고 어버이날인 8일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에서는 ‘어머니’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박완서 선생님은 “원주에 가면 항상 선생님께 뭔가 얻어 오곤 했다. 고추 감자 깻잎 등 손수 가꾼 채소들과 김치 등을 챙겨주시는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같은 분이었다”며 목이 메었다.
정말 그랬다. 신문기자인 나도 항상 선생님께 뭔가 얻으러 원주에 갔던 것 같다.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글을 받고 싶어서, 인터뷰는 거절하시더라도 그저 몇 마디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서, 또 감자나 고추 등을 얻으러 원주에 가곤 했다. 무엇이든 드리러 간 적은 없고 늘 뭔가 얻으러 갔다.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주셨다. 줘도 줘도 또 줄 것이 있었으니 선생님이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근배 시인이 영결식에서 선생님께 바친 시는 이렇게 이어졌다. <…선생님은 어머니이십니다/ 흙의 어머니이시고 물과 나무와/새와 물고기와 짐승들의 어머니이시고/소설의 어머니이시고/문학의 어머니이십니다/…선생님은 시대가 쏟아 붓는/노여움도 아픔도 한도/스스로 드넓은 ‘토지’의 품으로 안아주셨습니다…>
7일 영결미사를 집전하셨던 정의채 신부님은 박 선생님이 <토지> 를 구상하던 1960년대 후반 영세를 받던 날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박선생님은 테레사, 따님인 김영주는 소아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그날 아침 박 선생님의 어머니는 흰 종이를 마당 한 쪽에 깔고 영세를 받는 딸과 외손녀를 위해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 신부님은 “어머니의 정성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회고하셨다. 영세를 받은 후 오랫동안 냉담신자였던 박 선생님은 병석에서 종부성사를 받으며 많이 우셨다고 한다. 토지>
정 신부님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박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 시 <어머니> 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 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어머니> 어머니>
통영의 흙으로 돌아간 통영의 딸
선생님은 이제 삼십 여 년 꿈속에서 찾아 헤매던 어머니를 만나셨을 것이다. 결혼 4년 만에 사별한 남편, 어려서 잃은 아들도 만나셨을 것이다. 그리고 서희, 길상이, 윤씨 부인, 별당아씨, 구천이, 월선이, 용이, 봉순이… 준구와 최치수도 선생님을 마중 나왔을 것이다.
통영의 딸, 원주의 어머니, 하동의 전설이었던 선생님. 세속적인 모든 것을 치열하게 밀어냄으로써 이 세상 만물을 치열하게 껴안을 수 있었던 선생님. 산이고 강이고 토지였던 선생님…서울 원주 진주 통영 하동에서 추모제가 이어졌다. 그리고 선생님은 오늘 바다가 보이는 통영의 언덕에 묻혀 고향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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