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부족하면 오해가 생긴다. 여기에 ‘~했더라’는 전설적인 일화까지 보태지면 여간해선 진실과 본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마르타 아르헤리치(67). 1994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공연 당시 피아노 줄을 끊어 먹었던 괴력의 피아니스트, 지나친 완벽주의 때문에 연주회를 밥 먹듯 취소하는 괴팍한 ‘캔슬(cancel)의 여왕’,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시켰던 엄청난 파워와 완벽한 테크닉….
이 정도만 나열해도 아르헤리치의 이미지는 엽기에 가깝다. 그나마 친숙한 것을 찾으라면 수많은 ‘누나부대’를 이끌고 있는 한국의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후원자라는 것 정도다.
때문에 아르헤리치 앞에 ‘피아노의 여제(女帝)’란 수식어가 붙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60대 후반의 비대해진 몸집과 치렁치렁한 백발은 카리스마가 충만한 그녀에게 심지어 ‘마녀’라는 표현까지 등장시켰을 정도다.
하지만 젊은 시절 아르헤리치의 모습을 떠올리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도이치그라모폰의 ‘노란 딱지’가 붙어있는 그녀의 초창기 음반에선 숨막히는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피아노 앞에 앉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아르헤리치의 모습이 담긴 LP음반은 그 시절 충동구매로 남학생들의 주머니를 털어간 고약한 아이템이었다.
음악의 본질과 절대 연결돼선 안 되는 외모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걸로 굳어진 아르헤리치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다.
한국 관객과의 소통이 좀체 이뤄지지 않았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신격화된 절대지존이었다. 때문에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지휘 정명훈)과의 협연 무대(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는 놓칠 수 없는 ‘지존과의 소통’ 기회였다.
모두들 거장의 ‘한 방’을 기대했을 것이다. ‘또 줄이 끊어지진 않을까’하며 경박한 서커스마저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정시간보다 7~8분 가량 늦게 등장해 객석을 술렁이게 했던 아르헤리치는 자신을 신(神)으로 간주하는 관객들의 시선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연주가 시작되자 신격화된 아르헤리치는 사라졌고, 그 자리엔 프로코피예프만 남았다. “피아노는 원리적으로 타악기“라고 생각했던 프로코피예프의 의도대로 아르헤리치는 숨가쁘게 건반을 두들겼다.
거장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쇼맨십이나 거들먹거림 대신 아르헤리치는 교과서를 연주하듯 손쉽게 프로코피예프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를 교과서적으로 연주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연주가 끝난 뒤에도 여제로 군림하는 아르헤리치는 없었다. 관객의 열렬한 환호에 몹시도 수줍어했고, 허리를 90도 이상 굽혀 어색하게 인사했던 아르헤리치.
‘무대에서 외롭다’는 이유로 80년대 이후론 독주를 꺼렸던 터라 솔로 연주를 듣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관객들에게 그녀는 무려 3곡(스카를라티의 소나타 D단조, 쇼팽의 마주르카,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나 앙코르 솔로를 선사했다.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아르헤리치는 관객과의 소통에서 신격화된 자리를 박차고 낮은 곳에 임했다. 오로지 음악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다가왔다. 직접적인 소통이 아니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아르헤리치의 솔로를 3곡이나 들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다. 수고를 무릅쓰고, 라이브가 있는 연주회장을 찾아 소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석준ㆍ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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