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0대의 평범한 가장입니다. 그런데 좀 어색하네요. 가장이라면 가정의 ‘짱’인데 제가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전에야 아버지는 그야말로 짱이었지요. 저희 집 역시 아버지 밥상은 따로 차렸고, 반찬도 저희들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항상 장조림에다 들기름 곱게 발라 갓 구운 김이 번들거렸습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몸가짐이 달라지던 시절, 저도 자라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처럼 ‘가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가장’인지 잘 모르겠네요.
며칠 전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막 TV를 켜는 순간 아내가 불렀습니다. “여보, 나가서 쭈쭈(저희 집 애완견 이름) 먹이 좀 사다 줘요.” 순간 아니, 이 여자가 가장을 뭘로 보나 싶어서 “집에 사람이 몇인데 가장에게 개밥을 사오라는 거야? ”하고 발끈했습니다. “그럼, 설거지하다 말고 내가 가요?” “지수 있잖아?” “당신 요즘 텔레비전도 안 봐? 야심한 시간에 여자 애를 어떻게 심부름 시켜요? 학원 보내는 것도 조마조마한데.”
듣고 보니 초등 5학년 딸애를 밤길에 내 보내내는 건 그렇다 싶더군요. “그럼 덩치 큰 지석이 시키면 되겠네.” “도무지 애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낼 모래 중간고사인 거 몰라요? 시험 공부하는 애 심부름을 시키는 간 큰 부모는 당신밖에 없을 거야.” “그럼 당신이 내일 사면 되겠네.” “쭈쭈가 아까부터 배고파 낑낑대잖아요. 저걸 내일까지 굶기면 죄 받지.”
“그렇다고 이 시간에 가장에게 개밥 심부름을 시키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쭈쭈와 아내의 눈빛, 게다가 딸애까지 당연하단 표정으로 보는데 어쩔 수 없더군요. 딱히 태클을 걸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저를 참으로 외롭고 작은 남자로 만들고 있더군요. 그렇게 막 현관을 나서려는데 또 아내 목소리가 붙잡더군요. “나가는 길에 이 음식물 쓰레기도 좀 버려주면 안될까? ” ‘그래 이왕 버린 몸, 하나 더 해 준다고 가장의 위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김치냄새 풍기는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3층에서 탄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면서 “어머, 음식물 쓰레기를 직접 버리세요? 아이구 남자분이. 주세요. 저도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니까 같이 버려드릴게요.” ‘괜찮다’고 버텨봤지만 아주머니는 1층 문이 열리자 제 봉투를 낚아채듯 가져가 버렸습니다. ‘모른 척 해주었으면 덜 민망했을 텐데….’
저는 한동안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습니다. 예전 아버지의 손처럼 듬직하지도 거칠지도 않았습니다. ‘손에서부터 가장의 포스가 느껴지지 않으니 나를 우습게 보나?’하다가 픽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가장이면 어떻고 심부름꾼이면 어떠냐? 이 한 몸 바쳐서 마눌님과 아이들이나 이 거친 세상에서 탈없이 지켜내면 되지.’
혼자 자위하면서 이 시대의 쓸쓸한 가장은 밤바람을 맞으며 개밥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진 - 광주 북구 두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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