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을 제패하고 있는 한국의 휴대폰. 소비자 마음을 확 사로잡는 미려한 디자인과 첨단 기능에 세계인이 열광하고 있지만 막상 케이스를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는 별로 없다. 미국 퀄컴사 칩과 인텔 구동칩, 일본산 광학 렌즈….
진짜 돈이 되는 것은 이 부품과 보이지 않는 특허들이다. 삼성전자가 매년 지불하는 기술 로열티만 1조원이 넘는다. 수출이 늘어날수록, 부품수입과 로열티 지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경제 살리기를 위한 기업들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기업 스스로가 퀄컴이나 인텔 같은 '고부가가치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연구개발(R&D)이 쥐고 있다.
국내기업의 R&D투자금액 자체는 세계 상위 수준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선진국에, 양적으로는 중국에 밀리고 있다. 기업의 특허경쟁력을 평가하는 ipIQ의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 가전분야 상위 10대 기업 중 우리 기업들의 평균점수는 1,035점으로 일본기업들의 1,303점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같은 휴대폰 제조업체라도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미국 퀄컴에 엄청난 기술사용료를 물고 있는 것과 달리 소니에릭슨은 크로스 라이센싱이 가능한 특허 확보를 통해 로열티 부담을 크게 줄이고 있다.
■ 실용기술에서 원천기술로
관건은 R&D의 질적 성장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당장 돈 되는 실용기술 위주의 개발문화에서 벗어나, 부품ㆍ소재 같은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산업연구원이 지난해 말 608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업체들의 R&D는 주로 1, 2년내 활용가능한 분야(80.1%)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기초연구(6%)분야는 거의 미미한 실정이다. 또 국내 기업이 취약한 기술부문으로는 소재관련 기술(33.2%)이 가장 많았고 이어서 제품설계기술(27.3%)이 꼽혔다.
대신 조립가공기술(7.6%)이 취약하다는 응답은 매우 적어, 한국경제가 '부품 소재를 수입해 조립해 파는 산업구조'라는 통념이 사실임을 나타냈다.
이 같은 응답결과는 2002년 1차 조사 때나 2004년 2차 조사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5년 세월 동안 원천기술 부족현상은 개선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산업연구원 조윤애 연구위원은 "선진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연구개발 방향을 '응용ㆍ개발ㆍ기술추격형 R&D'에서 '핵심ㆍ원천ㆍ기술선도형 R&D'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국가간, 기업간, 산학간 협력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된 R&D를 위해선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R&D도 특정기업이나 특정국가 내에서 폐쇄적으로 진행하면, '규모의 경제'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인재, 시설, 노하우를 공유해야만 보다 높은 수준의 신기술, 핵심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선진국 기업에서 이미 검증된 경험이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체들의 R&D방식은 자체개발(60.2%) 위주이고, 공동개발(18.4%)이나 기술도입(12.3%) 전략적 제휴(9.0%) 등은 미미하다(산업연구원 조사). 그나마 공동개발과 전략적 제휴 대상도 국내 연구소와 대학(29%)에 집중되어 있어, 국경을 넘는 '글로벌 협력'풍토는 척박하기 짝이 없다.
반면 선진국들은 특히 생명공학이나 나노기술 등 '미래 첨단'분야 일수록 3개국 이상이 공동 참여하는 '다국적 연구'를 적극 진행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이원복 연구위원은 "부족한 국내 연구개발자원과 기술지식 등을 글로벌 차원에서 조달하기 위해 국내외를 막론한 공동개발, 전략적 제휴, 인수합병, 기술도입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중소ㆍ중견기업, 비 제조업부문도
대ㆍ중소기업간 양극화는 R&D도 예외가 아니다. 때문에 독자적 R&D 여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 일수록 외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대학이나 비슷한 업종의 중소기업끼리 적극적으로 공동연구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 독일, 대만 등을 보자. 이들 국가는 중견ㆍ중소기업들의 연구역량과 규모가 국가 경제를 든든히 받쳐주는 구조다. 삼성 LG 등 몇몇 대기업의 기술력에 국가경제 전체가 의존하는 우리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벤처기업 등 혁신형 중소기업은 물론 중견기업의 R&D 투자가 보다 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동종기업과 대학들이 특정지역에서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기적 협력을 이루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R&D는 제조업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비스업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2005년 기준 전체 산업 연구개발비에서 서비스汰?차지하는 비중은 11.3%에 불과하며, 그나마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부가가치는 서비스업에서 보다 많이 창출되는데, 이 역시 R&D가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금융분야가 대표적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아시아 금융허브'인 홍콩과 싱가포르 금융회사의 인력 중 금융전문가 비중이 각각 43.8%, 51.3%인 반면 국내 금융회사는 87.6%가 보조인력이고 8.9%만이 금융전문가다.
법률서비스, 의료서비스 등에서의 연구개발도 선진국에 비해 극히 부진한 상황이다. 지식경제로의 이행, 서비스산업 고도화 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 제조업 분야에서의 R&D 투자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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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핵심은 사람… '사오정 기술자' 中 유출 심각
S중견기업은 기술직 채용기준에 800점 이상 토익점수를 내걸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해외 수주액이 30%가 넘는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어학이 필수"라고 말했지만, 실상 기술직 직원이 업무상 영어 쓸 일은 거의 없다.
한 프로그래머는 "외국과의 공동 연구나 개발 등 업무에 필요한 어학 능력은 입사 후 교육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아키텍쳐 설계 등 고급 프로그래밍을 위해서는 수학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지식경제 시대 최고의 경쟁력은 사람이다. 뛰어난 연구자, 엔지니어가 만들어 낸 기술의 가치는 수십년 동안 기업과 국가를 먹여 살리는 자산이 된다. 연구개발(R&D) 투자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도 우수인력확보와 인재교육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의 인재 채용과 인사 시스템은 아직도 개선 여지가 많다. 업무 분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대기업 공채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대학생들이 공기업과 공무원 시험, 고시만 바라보는 현실을 탓하기에 앞서 연구자와 엔지니어 같은 전문 기술인력에게 제대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보한 인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최고의 대우도 필수다. 과거 국내 기업들이 일본 퇴직 연구자들을 스카우트해 기술 전수를 받았듯, 최근 중국 기업들은 국내 기업의 전현직 연구자들에 대해 무차별 스카우트 공세를 펴고 있다.
40대 중반이면 퇴직을 고려해야 하는 한국 기업의 풍토에서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도 이른 나이에 퇴직하는 한국 엔지니어들은 중국 업체의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업체들이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기술 인력에게 제대로 대우를 해 주는 대신 전직 금지 각서나 소송 등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충성심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 이와 보조를 맞춰 국회는 산업기술유출방지법까지 만들어 엔지니어들의 전직을 사실상 가로 막았다.
전남대 물리학과 이형종 교수와 연구팀들은 국내 광통신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 받았는데도 과거 몸담았던 기업으로부터 해외에 기술을 유출했다는 모함을 받고 기소됐다. 수년 동안의 재판 끝에 지난달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함께 기소됐던 연구원들은 "절대 내 자식을 이공계에 보내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뛰어난 엔지니어를 '모시기' 위해 엄청난 연봉과 높은 보직, 재교육 기회 등 파격적 대우를 약속하고 있다. 세계 최대 검색업체 구글은 엔지니어들에 대한 대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포천지 보도에 따르면 구글에 입사하는 경력 엔지니어는 억대 연봉은 물론 입사와 동시에 800주의 스톡옵션과 400주의 매각제한 조건부 주식을 받는다. 3, 4년만 지나면 스톡옵션 행사만으로도 10억원 가까운 떼돈을 번다.
사내에서 개발한 기술에 대해 기술자에게는 기껏해야 수천만~1억원 정도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국내 대기업과 달리, 구글에서 혁신적 서비스를 개발한 직원들은 100만달러(약 10억원)의 상금도 받는다.
"대기업에서 기본급 받고 남 좋은 일만 하기는 싫다"며 동창생과 소규모 기업을 차린 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연공서열과 상관없는 성과주의 정책으로 뛰어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를 대우해 주어야 이공계에 인재들이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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