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윤흥길, 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윤흥길, 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입력
2008.05.07 00:23
0 0

"선생님과 동시대 살았던 우린 옥토에 뿌려진 운좋은 씨앗들"

어머님이 가셨습니다. 어머님을 잃었습니다. 문학의 어머님을 떠나보내는 지금, 극심한 고아의식이 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7일, 학교에서 정년퇴임 절차를 마친 후 오랫동안 별러온 원주행을 도모하여 토지문화관 창작실에 입실하던 날, 사무실에서 우연히 뵌 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새 깜짝 놀랄 만큼 초췌해지신 용모를 걱정하는 저에게 선생님은, 작년에 걸린 식중독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실은 폐암과 투병 중이면서도 태연히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하러 왔으니 토지문화관에 머무는 동안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 말고 오직 집필에만 전념하라고 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평상시의 선생님다운 말씀이기에 저는 그 거짓말에도 감사하고 매정하게 자르는 말씀에도 감사합니다. 오직 집필에만 전념하라. 선생님이 저에게 주신 귀중한 유언입니다.

엄혹했던 유신 독재 말기에 정릉 자택으로 처음 찾아뵌 이래 여태까지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눈앞에 차례차례 펼쳐집니다.

당시 저는 선생님을 옛적 중국의 기악인 사광(師曠)에 비유했습니다. 천상의 음률을 감득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됨으로써 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는 사광, 부군 옥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따님 대신 외손자를 돌보는 한편 금욕하는 수도자처럼 정릉 골짜기에 틀어박혀 세속적인 욕망과 철저히 담을 쌓은 채 오직 민족의 대서사 <토지> 의 집필에만 골몰하는 박경리, 이들 두 예술가의 모습이 제 눈에는 한데 겹쳐 보였습니다.

당치도 않다고, 과분한 비유는 사절한다고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셨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사광을 떠올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창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버리고 희생할 정도로 선생님은 자신에게 가혹했던 반면 문단 후배들에게는 넉넉하고 자상한 어머니처럼 늘 꼼꼼히 챙기고 돌보셨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느라 작품을 못 쓰고 생활고까지 겪던 힘든 시절 어느 날, 은밀히 제 집사람을 불러 은행에서 방금 꺼낸 빳빳한 신권 뭉치를 두툼한 책으로 위장해서 건네주신 그 후배 사랑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사랑과 격려에 접하고 용기를 되찾은 후배가 저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영정은, 나처럼 하라고 지금도 묵언으로 저에게 권면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선생님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다만, 선생님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열심히 선생님 흉내를 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고결하신 인품을 흉내 내겠습니다. 철저를 극한 작가의 자세를 흉내 내겠습니다. 미물마저 소중히 여기시던 생명 사랑의 정신을 흉내 내겠습니다.

저는, 아니, 선생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는 박경리라는 비옥한 토지에 뿌려진 운 좋은 씨앗들입니다. 그 풍요한 토양이 물려주는 자양분 많은 젖을 양껏 빨면서 저나 제 작품도 앞으로 더욱 키가 자라고 더욱 튼실해지리라 믿습니다.

내 문학의 어머님이신 박경리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지극한 존경의 염을 바칩니다.

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삼가 윤흥길 올림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