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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씨 타계/ '토지'에 쏟아부은 각고 25년… 한국문학 '큰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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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씨 타계/ '토지'에 쏟아부은 각고 25년… 한국문학 '큰뿌리'로

입력
2008.05.06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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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타계한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씨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박수영(朴壽永)씨의 장녀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8세에 박씨를 낳은 아버지는 조강지처를 떠나 재혼했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에게 미련을 거두지 못했다. 박씨는 ‘나의 문학적 자전’(1984)이란 글에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성장기를 회고했다.

박씨는 스스로를 학창시절에는 ‘평범하고 공부를 못했던 아이’였다고 했지만, 대신 “야욕스럽게 독서와 시 쓰기에 매달렸다”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묶여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없이 폭발했다”고 이 글에서 회고했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이듬해 김행도(金幸道)씨와 결혼해 상경한 박씨는 6ㆍ25 때 남편이 사망하고, 전쟁 직후에는 아들을 잃는 불행을 겪었다.

53년 서울로 돌아와 외동딸(김영주씨ㆍ토지문화관장)을 기르며 상업은행 등에서 일하던 박씨는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소설가 고 김동리의 두 차례 추천으로 56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다. 시 대신 소설을 쓸 것을 권유한 사람도, ‘경리(景利)’라는 필명을 지어준 이도 동리였다.

박씨는 <시장과 전장> (1964) 이래로 외부와 교류를 끊으면서 적조해진 사제 관계가 90년 동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야 이어진 것에 대한 회한을 여러 차례 드러내기도 했다.

등단 이후 60년대 말까지 박씨는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 인기 작가였다. 그가 이 기간 발표한 작품 수는 장편 18편, 중ㆍ단편 34편에 이른다. 그 중 장편 <표류도> (1959)는 경제적 안정을 준 출세작이 됐고, <내 마음은 호수> (1961), <시장과 전장> 은 최인훈의 <광장> (1960)과 더불어 전후문학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다른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 (1962)과 <파시> (1965)도 이 때 나왔다.

박씨가 필생의 대작 <토지> 집필에 착수한 것은 우리 나이로 마흔넷이던 69년. 70년대 중반까지 장편 2편을 발표한 걸 빼면, 이때부터 25년간 박씨의 문학 역량은 오직 <토지> 에만 집중됐다. 박씨는 69~72년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72~75년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했고, 1년여의 휴지기 후 77~78년에 ‘독서생활’과 ‘한국문학’에 3부를 연재, 탈고했다.

집필 중 우환도 적지 않아서 1부 연재 중 유방암 수술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했고, 자신의 외동딸과 결혼한 이듬해인 74년부터 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사위인 시인 김지하씨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80년 서울 정릉을 떠나 치악산 자락의 강원 원주시 단구동으로 이사한 박씨는 3차례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 끝에 ‘정경문화’와 ‘월간경향’ 연재로 <토지> 4부(83~88년)를 마쳤고, 92년부터 문화일보에 5부를 연재, 94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해 8월15일 새벽2시 <토지> 를 탈고한 뒤 가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 <토지> 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핍박 속에 견뎌낸 우리 민족의 딱한 사정과 생명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담은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박씨는 원주에서 직접 텃밭을 가꾸면서 화학비료를 일체 쓰지 않고 물자를 철저히 재활용하는 등 친환경적 삶을 몸소 실천했다. 창작에만 전념하던 오랜 칩거 생활을 깨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93년4월~94년10월)를 맡을 만큼 환경 문제에 대한 박씨의 관심은 각별했다.

그는 96년 2~7월 6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칼럼 ‘생명의 아픔’을 비롯, 10여년간 자신의 생명사상에 기반해 발표한 칼럼과 강연문을 묶어 산문집 <생명의 아픔> (2004)을 펴냈다.

박씨가 80년부터 97년까지 거주하며 창작에 매진했던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95년 택지개발지구에 편입되면서 헐릴 위기를 맞자 문인 등 여론은 보존의 목소리를 높였고 토지공사가 일대를 공원부지로 변경해 자택을 보존하기로 결정, 99년 ‘토지문학공원’이 조성됐다.

같은 해 인근 흥업면 매지리에 대지 3,000평, 연건평 800평 규모의 지상 3층 건물인 ‘토지문화관’이 지어져 학술회의 및 작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박씨는 개발 보상비를 문화관 건립에 기탁하고, 문화관에 입주해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손수 챙겨왔다.

<토지> 완간 후 한동안 작품 발표가 뜸했던 박씨는 여주인공 해연의 가족사를 통해 광복 이후 한국사를 그려낸다는 목표로 ‘현대문학’ 2003년 4월호부터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 를 연재했으나 3회 만에 중단했다.

박씨는 한 대담에서 그 이유에 대해 “<토지> 의 종착점이었던 광복 이후의 역사를 지식인에 국한해서 쓰려고 하니까 올이 수도 없이 많아져 감당이 안됐고 결국 건강에도 무리가 왔다”고 말했다. 이 소설은 미완성인 채로 2007년 5월 펴낸 마지막 저서인 산문집 <가설을 위한 망상> 에 실렸다.

당뇨, 고혈압 등 지병에 시달렸던 박씨는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스스로 치료를 물리쳤다. 올해 3월 ‘현대문학’에 신작시 3편을 기고하는 등 창작의 열정을 사르던 그는 지난달 4일 원주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 아산병원에서 투병해 왔다.

■ 박경리 연보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여고 졸업

▦1955년 단편 <계산> 이 월간 '현대문학' 추천, 1956년 단편 <흑흑백백> 으로 추천 완료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9년 장편 <표류도> 로 내성문학상 수상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출간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1969년 <토지> 집필 시작

▦1972년 월탄문학상 수상

▦1990년 인촌상 수상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94년)

▦1994년 <토지> 탈고ㆍ완간, 이화여대 명예문학박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올해의 여성상' 수상

▦1996년 호암상 수상, 칠레 정부 '가브리엘 미스트랄 기념 메달' 수여

▦1997년 연세대 석좌교수

▦1999년 토지문화관 개관

▦1999년 한국일보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고전' 문학-소설 부문 1위에 <토지> 선정,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예술인' 선정

▦2002년 <토지> 21권으로 재발간

▦2003년 문화ㆍ환경 전문 계간지 ' 숨소리' 창간, 장편 <나비야 청산 가자> 현대문학에 연재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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