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첫날 아침. 칭시완(淸水灣-Clear Water Bay)에 위치한 한 빌라.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파란 하늘 그리고... 파아란 바다가 멀리 수평선에서 만나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는 뻥 뚫린 푸른 공간... 비행기와 배가 각기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 하얀 분필 칠을 하며 지나간다.
“아침 식사 준비 됐어요.” 거실에서 집안일을 도와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정부를 ‘아 마’ 라고 한단다. <쇼 브라더스> 사는 나에게 빌라와 가정부, 승용차와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를 제공하였다. 그녀는 영어, 중국어(본토어)와 홍콩어(광둥어), 일본어가 가능하다고했다. 그녀와 생활하면 최소 4개국의 기본생활어는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쇼>
아침식사는 홍콩식으로 차려졌다. 나를 위해 특별히 일본쌀을 구입했다고 했다. 식사 끝에 초록빛이 살아있는 야채 스프가 나왔다. 중국식에선 스프가 뒤에 나온다고 가정부가 설명해 준다. 입안을 씻어내기 위해서란다. 큰 식당에 가면 식사후 손을 닦기 위해 중국차를 큰 유리그릇에 담아 준다고도 한다.
그녀는 나의 홍콩 생활을 위해 중국 음식문화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한참 재미있게 설명을 듣고 있는데 한 중년 신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를 도와 줄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 ‘왕선생’이라고 소개하였다. 첫인상이 만화에서 나오는 마음씨 좋은 ‘왕서방’ 같았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밝은 노란색 폭스바겐> !! 밝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색상이었다. 택시를 빼고는 거의 모든 승용차가 검은 색 아니면 매우 칙칙한 색이었다. 밝고 화려한 승용차를 선택할 여지가 없는 시대 분위기였다. 차 안은 보기와는 달리 넓고 아늑했다. 우리는 신나게 S자의 숲길을 달렸다.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 흐르는 맑은 공기를 잡아보았다. 홍콩의 10월은 한국의 한 여름 기온이었다.
차가 해변을 따라 5분쯤 달리자 멀리 벼랑 같은 곳에 작은 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저게 뭡니까?” 그가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쇼 브라더스입니다.”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일개 영화사가...?’ 차가 그 성으로 접근 하자 거대한 철문이 자동으로 스르르~ 열렸다. 이어 하얀 수염에 인도복장을 한 거구의 두 남자가 장총을 메고 다가왔다. 왕선생이 패스를 보여주며 나를 소개하자 환히 웃으며 커다란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10월1일은 중국의 건국기념일이기 때문에 홍콩 전역에 테러 및 폭동대비 비상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중국본토에서 망명한 유명한 배우와 스탭을 보호하기 위해 <쇼브라더스 타운> 경비근무자들도 전원 무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설명을 들은 나는 ‘정말 대단한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브라더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며 더욱 그랬다. 넓은 정원이 나타났는데 그 사이로 20층에 가까운 높은 건물 두 동이 그림 같이 서 있었다. 전속 배우와 스태프들의 아파트라고 했다. 1967년 당시, 서울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 5층 아파트를 건설할 때였다.
성처럼 보인 높은 건물 위에는 마크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Shaw Brothers 의 약자로 미국의 Warner Brothers를 본 따 만든 듯했다. 왕선생은 건물 앞에서 회사의 내력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10년 전, 촬영기사인 형 Rume Shaw와 프로듀서인 동생 Run Run Shaw 두 형제가 독립 프로덕션를 싱가포르에서 만들었다.
이후, 회사가 성장하여 형은 싱가포르, 동생은 홍콩에서 회사를 운영하여 현재 200여명의 배우와 1,000여명의 감독 및 작가, 스탭이 전속되어 있고 48개의 대형 스튜디오, 야외 스튜디오, 편집, 녹음실, 현상소 등을 갖추고 연간 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여 동남아시아의 365개 직영극장을 통해 배급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국> 이라고 하였다. 아시아>
홍콩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칭시완 초원 위에 펼쳐진 48개의 대형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후에 보게 될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일본의 동보 스튜디오 등등도 쇼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규모에 한참 떨어졌다.
모든 스튜디오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눈에 익은 영화제목이 한 스튜디오 입구에 붙어있었다. ‘외팔이 시리즈 2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촬영 중에는 런런쇼의 허가 없이는 누구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영화의 특성 상 촬영장은 철저히 보안이 되어 있었다.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저런 대우를 받게 되겠군...’
마침내 런런쇼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의 사무실은 성곽 같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비서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 그는 몹시 반가워하며 나를 껴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나?위해 회사 임원은 물론 신문기자들까지 참여시킨 중요한 회의를 마쳤다고 하였다.
중국영화 70년사에 처음으로 한국배우가 출연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의 예명을 ‘河明鍾’ 대신 중국의 ‘中’자를 넣어 ‘何明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한 외국배우의 등장을 역사적 관점까지 확대해 고려한 그들의 성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1967년. 한류의 역사를 만들며 ‘하명중’이 탄생한다. 런런쇼는 며칠 후, 홍콩총독 내외를 비롯하여 홍콩 모든 매체의 영화기자들과 쇼브라더스의 최고의 스타들, 감독들을 초청하여 ‘하명중’을 소개하는 어마어마한 파티를 열었다.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리리화, 동양의 로버트 테일러라는 엔츈 배우 겸 감독, 외팔이 시리즈의 최고의 스타 왕위와 장철감독, 로위, 최고의 여류스타 쳉페이페이, 리칭, 허리리, 징리 등 홍콩의 영화계를 주름잡는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허 밍 쭝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샴페인 잔을 들어올렸다. 다음날 홍콩의 모든 매체의 영화 면 톱뉴스에 내 사진이 올랐다. <중국영화 70년사에 한국영화배우 최초로 등장 - 그의 이름 ‘하 명 중’!!>중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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